섬나라 타이완에 이렇게 온천이 많은 줄 몰랐다. 타이완 가이드북을 만들겠다고 타이베이·타이중·이란·가오슝 등 전국을 돌아다녀 보니 지역마다 온천 하나씩은 꼭 있었다. 지열 활동이 활발하고, 강수량이 풍부한 타이완은 일본 다음으로 온천이 많은 나라였다.
온천 덕에 타이완 여행이 한결 여유로워지기도 했다. 온천물에 몸을 푹 담그는 것 자체가 온전한 휴식 아니던가. 현지인들처럼 온천 중 마실 차 한 병만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몸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목은 촉촉하게 유지하는 것이 타이완 사람들이 온천을 즐기는 비법이다.
수도 타이베이 근교에만 베이터우·양명산·우라이 등 온천이 3곳이다. 하나같이 싱그러운 자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중 지하철로 쓱 갈 수 있는 베이터우는 치유의 효능이 있는 온천으로 유명하다. 몸에 좋은 라듐을 함유한 유황석 효과란다.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타이완 최초의 온천이기도 하다. 그 덕에 곳곳에 일본식 온천의 흔적이 오롯하다.
지금도 베이터우를 찾던 나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하철역을 나설 때마다 베이터우 공원이 뿜어내는 초록의 기운이 흠뻑 느껴졌다. 뜻밖에도 공원 초입에서 시선을 끄는 건물은 온천이 아닌 목조 도서관이었다. 그저 서가 사이를 걷기만 해도 삼림욕을 하는 듯 청량했다. 테라스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으면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서관 곁에는 옛 온천탕을 개조한 온천박물관이 있다. 온천박물관을 지나 중산로(中山路)를 따라 오르면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온천 마을이 나타난다. 길옆으론 졸졸졸 계곡 물소리가 배경음악처럼 흐른다.
베이터우 온천의 진원지 지열곡(地熱谷)은 좀 더 은밀한 곳에 있다. 점점 짙어지는 달걀 냄새(유황 냄새)를 따라가니, 푸른 숲 사이로 수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바람이 수증기를 흩어놓자 에메랄드빛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펑’하고 산신령이 나타날 것 같은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90도 넘는 온천수의 펄펄 끓는 열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지열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따라 대중 노천온천부터 고급 호텔까지 각기 다른 온천이 포진해 있다. TV 예능 ‘꽃보다 할배’가 다녀간 친수노천온천은 단돈 40타이완달러(한화 1500원, 65세 이상 반값)로도 노천 온천을 누릴 수 있어 늘 인기다. 하루에 5번씩 물을 갈 만큼 수질 관리도 철저하다.
지열곡 초입의 수도온천은 전망과 수질을 겸비하고 있다. 옥상 노천 온천에 몸을 담그면 지열곡의 수증기가 용처럼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깨를 누르던 카메라 무게에서 벗어나 수도온천의 야자수 아래 노천탕에서 보낸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한결 보송보송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산 중턱에 숨어있는 베이터우 문물관으로 향했다. 1920년에 지은 일본풍 가산여관을 개조한 사설 박물관으로, 일본식 다다미에서 타이완 전통차를 맛보는 다실이 있었다.
다실에서는 오래된 건물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자연스레 우러났다. 동팡메이런(東方美人)·동딩우롱(凍頂烏龍)·티에관인(鐵觀音)….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 보다 고혹적인 동양의 미인이 떠오르는 동팡메이런을 주문했다. 동팡메이런은 동딩우롱과 함께 타이완을 대표하는 청차다. 청차 중에서는 발효도가 높아 다즐링 홍차에 가까운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이른바 ‘샴페인 우롱차’라고도 불린다.
정갈한 다구를 가지고 온 종업원이 바로 앞에서 돌돌 말릴 찻잎을 앙증맞은 찻주전자에 담아 뜨거운 물을 부었다. 차가 우러나는 동안 우롱차 우리는 법을 찬찬히 설명해 줬다. 도르르 찻잔 채우는 소리에 은은한 향이 감돌았다.
한 모금 두 모금 차를 마실수록, 지열곡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처럼 입안 가득 차향이 번졌다. 그 맛에 의식을 치르듯 열심히 차를 우렸다. 세 번, 네 번 계속 우리다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니 동그랗게 말려있던 차가 스르르 풀어져 있었다. 덩달아 머릿속이 느슨해지는 듯했다. 그저 차를 마실 뿐인데, 걱정은 사라지고 잠들었던 감각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물끄러미 찻잔을 들여다보며 ‘동팡메이런’을 되뇌었다. 흰 잔 속 우롱차는 미풍이 스쳐간 호수처럼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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