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 진 ♡/세계여행가이드

미지의 남미 땅을 두 바퀴로 달리다

거울속의 내모습 2016. 3. 31. 23:04


도로를 달릴 때도 차량들은 경적을 울리지 않고 알아서 피해간다. 우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준 이들도 적지 않다.
2014년 어느 날, 우연히 읽은 쿠바 자전거 여행기. 당시 무기력한 일상을 살던 내게 그 책은 여러모로 생기를 불어 넣었다. 이후 서점의 쿠바 여행 서적을 모조리 사 읽으며 행복에 빠져 사는 쿠바인들의 삶을 꿈에 그렸고, 결국 2015년 초 장기휴가를 신청하며 꿈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그렇게 낯선 남미 땅에서의 긴 자전거 여행이 시작되었다.

미지의 땅으로 날아가다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은 쿠바행 항공권을 구입한 2015년 5월 이후였다. 홀로 자전거를 타며 기초 체력을 길렀고, 그해 8월에는 직장인 자전거 모임에 가입해 자전거 바퀴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방법 등을 익혔다. 모임에서 전문적인 기술을 익힌 뒤에는 여행 계획을 보다 구체화했다. 페니어(자전거에 부착하는 가방)를 달고 다니기 위해 짐받이를 설치하고, 핸들바 가방도 부착했다.

쿠바에 도착하자마자 조립을 마친 자전거. 여행 기간 동안 ‘알초’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자전거 여행의 기본 틀을 마련한 뒤, 무더운 여름날 약 20kg의 짐을 넣고 이틀간 서울~춘천을 왕복하는 등 막바지 장거리 주행 연습을 수차례 거쳐 드디어 2015년 11월 2일, 쿠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 하네다와 캐나다 토론토를 거쳐 도착한 쿠바 호세 마르티 공항은 국내 김포공항 규모도 채 되지 않았다. 같이 실려 온 짐과 자전거까지 다 찾고 나니 꼬박 1시간 반이 지났다.

미리 예약해 둔 숙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지만 잠자리가 바뀐 탓일지, 앞으로의 여행이 설레서인지는 몰라도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했다. 결국 새벽에 일어나 자전거를 조립하기 시작했는데, 운송될 때 사고가 났는지 기어 쪽의 부품이 깨져 있었다. 다행히 운행에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첫날부터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는 것 같아 불안했다.

Santiago de Cuba의 혁명광장에서 출발 기념으로 사진 한 컷 찰칵!
시내로 나와 은행에 들러 환전을 했다. 쿠바는 이중 화폐제도를 운영한다. 외국인은 CUC(세우세 혹은 쿡)만 써야 하고 자국민들은 CUP(세우페 혹은 쿱)만을 사용한다. 이마저도 체계화되어 있지 않아 외국인인 내게 CUP를 거슬러주거나, CUC를 아예 받지 않거나 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여행 내내 골머리를 앓았다. 이후 라 플로리디타와 아르마스 광장, 그리고 유명한 말레꼰(Malecon, 미국이 건설한 방파제) 등 관광지를 구경하며 하루를 보내고 밤 11시쯤 이번 여행의 동반자인 이정수 형님을 호세 마르티 공항에서 만났다.

이튿날 아침, 정수 형의 자전거 역시 조립을 마치고 터미널로 향했다. 자전거 여행 출발지로 삼은 ‘Santiago de Cuba’로 가는 버스에 올라 정확히 15시간 44분을 달려 도착했다. 늦은 시간이라 인근 숙소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여행 기간 중 필요한 식료품과 생필품을 사는 등 자전거 여행을 위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

시내를 빠져나와 도로에 입성하기 전, 가야 할 방향을 미리 확인한다.

낯선 땅에서 치른 호된 신고식

출발 당일(11월 8일) 아침, 숙소에서 아침을 두둑이 챙겨 먹고 Santiago de Cuba 바닷가를 출발지로 삼아 드디어 라이딩을 시작했다. 최상의 컨디션인 첫날이라 ‘올긴(Holguin)’ 지역까지의 142km를 목표로 잡았다. 하지만 날씨가 예상했던 만큼보다 훨씬 무더웠고, 길이 오르내림이 심해 체력 소모가 많았다.

한참을 달리다 날이 어두워진 오후 7시쯤에는 한 언덕을 오르다 미끄러져 도로에 넘어지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또한 이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길거리에서 노숙을 했는데, 정수 형은 야영장비를 가져와 편하게 잠을 잤지만 필자는 ‘쿠바가 뭐 춥겠어’라는 생각으로 맨몸으로 해먹에 누워 잠을 청했다. 결국 새벽에 날씨가 너무 추워 티셔츠를 3개나 껴입고 동이 틀 때까지 잠을 설쳤다. 쿠바에서의 ‘신고식’을 제대로 치르고야 만 것이다.

도로를 달릴 때도 차량들은 경적을 울리지 않고 알아서 피해간다. 우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준 이들도 적지 않다.
이튿날 오전이 되어서야 Holguin 시내에 발을 들여 간단히 요기를 하고, 정오쯤 곧바로 ‘Las Tunas’로 방향을 틀었다. Holguin에서 Las Tunas까지는 약 75km. ‘넉넉잡고 5시간이면 닿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머리 위로 작열하는 태양과 도로 위로 수없이 다니는 ‘까미욘(트럭을 개조한 버스)’과 같은 트럭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여기에 수시로 변하는 날씨 때문에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도 언제나 걱정해야 했다.

겨우겨우 Las Tunas에 도착해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고는 정수 형과 앞으로의 일정을 상의했다. 형은 '이렇게 가다가는 최종 목적지인 ‘아바나(Habana)’는 커녕 중간 지점에서 일정을 마치고 집에 가야 할 판'이라며 '중간 중간 버스를 이용해 여정을 이어가자'고 제안했다. 일정상 11월 18일까지는 Habana에 도착해야 하는 형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쿠바의 날씨는 좋다가도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 일쑤다. 하지만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비를 뚫고 나아가야했다.
이에 동의하고 버스터미널이 있는 Camaguey까지 약 125km를 달렸다. 도중에 사이클 복장을 입고 있는 한 쿠바인을 만났는데, 우연히도 이 친구가 Camaguey에 살고 있어 그의 안내로 편하게 터미널까지 갈 수 있었다. ‘Goyito’라는 이름의 이 친구는 우리를 'My Friend!'라고 외치며 자기 일처럼 친절히 버스표까지 예매해 주었다. 고된 여정 중 만난 천사 같은 친구였다.

‘코발트빛’ 카리브해를 달리다

쿠바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확연하게 느낀 점은 쿠바인들은 대부분 친절하다는 것이다. 먼저 'Hola'를 외치면 차에 탄 사람이건, 마차를 모는 사람이건, 집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건, 아이들이건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응답했다. 거기다 환한 미소까지 더해주니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에 절로 힘이 솟았다.

아이들이 있는 곳을 지날 때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잠시 쉬어가며 펜과 노트 등을 선물했다.
여정의 절반이 되던 날인 11월 14일, Trinidad와 Cienfuegos를 지나 ‘체 게바라의 도시’라 불리는 Santa Clara에 도착했다. 그동안의 일정에서 무리를 한 것인지 너무 피곤하고 몸이 무거워 Varadero까지는 버스를 이용했다. 지친 몸을 회복할 계획으로 카리브해 최고의 휴양지인 Varadero에서 하루를 쉬며 코발트빛 바다에서 스킨스쿠버와 스노클링을 즐겼다.
작은 휴게소에서 만난 ‘Goyito’라는 친구가 우리를 Camaguey 지역까지 안전하게 이끌어줬다.
짧은 휴가를 만끽하고 다시 출발. 37km의 비교적 짧은 거리에 있는 마탄사스(Matanzas)로 향하는 길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해변을 끼고 달리는 덕분에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시원하게 내달렸다. 그동안의 여정과는 다르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페달을 밟으며 목적지인 ‘아바나’로 향했다.

지난 8일 산티아고 데 쿠바를 떠나 11일 만에 드디어 아바나에 도착했다. 차로는 15시간 정도면 충분할 거리를 자전거로 11일을 걸려 온 셈. 이마저도 정수 형 말대로 두 구간을 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해안도로 어딘가를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사탕수수 줄기를 직접 짜 즙을 내는 모습. 갈증 해소에는 사탕수수 즙이 최고다.
아바나에서 맞는 19일 아침, 이틀 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정수 형과 쿠바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쌓기 위해 Vinales 지역을 둘러보았다. 공항을 이용하기 위해 다시 아바나로 돌아가는 형은 '서울에 가면 제수씨에게 여행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얘기할게. 몸조심하면서 자전거 끝까지 잘 타!'라고 당부했다. 필자도 '형도 잘 챙겨서 귀국하세요. 서울 가면 같이 막걸리 한 잔 합시다!'라는 말을 건네며 쿠바 서쪽에 위치한 Maria la Gorda까지 가는 길을 홀로 찾았다. 낯선 땅에서 혼자가 되니 기분이 설렘과 두려움 사이를 오갔다.
‘체 게바라의 도시’인 산타 클라라에는 여기저기 체의 형상물이 서 있다.

홀로 꿋꿋이 밟아 나가는 페달

11월 21일 새벽 5시 20분. 숙소 주인 아주머니의 노크를 받고 일어나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충분한 물과 여분의 간식을 챙겨 나왔다. Maria la Gorda까지는 약 190km. 이 거리를 나머지 일정동안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에는 너무 빠듯할 것 같아 택시를 타고 이곳까지 향했다. 3시간 20분 정도 걸려 도착한 뒤 다시 자전거에 올라 해변길을 따라 라이딩을 시작했다.

라페로 향하는 길에서 잠시 쉬어간다.
Maria la Gorda는 포장도로가 나 있는 상태라 지도만 보고도 잘 찾아갈 수가 있었다. 때 묻지 않은 해변, 맑고 깨끗한 바닷물,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조화롭게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느라 La Bajada까지 14km를 달리는데 1시간 반이 걸렸다. 사실 쿠바 영토의 서쪽 끝은 이곳에서 58km를 더 가면 나오는 Cabo de San Antonio이지만 이어지는 길이 비포장도로라는 소식을 듣고는 고된 여정이 될 것 같아 아쉽게도 포기했다.
100m의 아찔한 높이를 자랑하는 ‘바쿠나야구나’ 다리(Puente de Bacunayagua). 이 다리가 생시면서 길이 30분 가량 단축되었다.
La Bajada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La Jaula와 Valle San Juan, Las Cajas, Manuel Lazo의 크고 작은 마을을 거쳐 La Fe에 도착했다. 중간 중간에 만난 마을 사람들 모두 홀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필자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며 환호하며 몹시 반겨주었다. 이들이 보내주는 응원 덕분에 힘든지도 모르고 다시 아바나를 향해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La Fe에서부터는 국도가 시작돼 도로사정이 훨씬 좋아졌다. Guane에서 Vinales까지의 약 73km 구간은 지역 특성상 물이나 간식 등을 사 먹을 곳이 중간 중간 위치해 있지 않아 체력 안배에 신경을 써야 했다. 특히 Cabeza에서 Pons로 향하는 도로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인 폭이 좁고 오르내림과 굽이가 많은 길이 이어졌다. 끝이 없는 오르막과 내리막 덕에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었고, 허벅지의 피로는 더해갔다.

날이 너무 더울 때는 아름다운 카리브해에서 잠시 쉬어간다. 이것이 자전거 여행의 매력 아니겠는가.
La Palma까지 가는 길에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쫄딱 맞았다. Las Pozas까지 45km를 더 가야 하는데 식량도 떨어져 아주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폭우 속 한참을 더 달려 간신히 사탕수수 즙과 빵을 구해 체력을 보충하고는 시내에 들어서 젖은 몸을 말렸다. 하루 종일 비를 맞아 퀴퀴한 냄새가 나는 옷들을 숙소 아주머니에게 세탁해 달라 부탁을 하고 고된 몸을 뉘었다. 이제 아바나까지 한달음 거리.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는 구간이라 아침 일찍 출발하면 오래 걸리지 않고 아바나에 도착할 수 있다.
La Fe로 가는 도중 만난 야생 소. 단단한 뿔이 인상적이었다.

여정의 마지막, 다시 아바나로!

하지만 이튿날에도 날은 계속 우중충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비가 내렸던 탓에 몹시 후텁지근한 공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아바나까지의 거리는 92km. 부지런히 달리면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아바나에 다다를 수 있겠지만, 동쪽으로 향하다 보니 서쪽을 향해 불어대는 바람을 헤치고 가야했다.

이국적인 쿠바의 풍경이 자전거 여행 내내 눈을 즐겁게 해준다.
왕복 2차선 도로를 한참 달리다 길옆으로 거대하게 솟아 있는 큰 나무 밑에서 잠시 쉬었다. 쿠바에서의 자전거 여행도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막바지에 다다르니 여러 순간들과 생각들이 스쳐갔다.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잘 달려와 감사할 따름이었다. 달려온 도로를 돌아보며 새로운 마음으로 마지막 구간을 내달렸다.
트리니다드 마을의 전경.
Quiebra Hacha와 Orlando Nodarse를 거쳐 드디어 아바나로 가는 고속도로 진입 구간에 도착했다. 바람이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는 탓에 결국 길을 잃고 중간에 도로를 잘못 탔다.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닿을 줄 알았던 아바나에는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에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아바나는 쿠바의 수도인 만큼 면적이 커서 예약한 숙소까지 가는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후련한 마음보다는 갑자기 지긋지긋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자전거를 보니 이내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한 달여간 손과 발이 되어 쿠바 전역을 달려준 나의 애마에게 애정 어린 마음을 전하며 쿠바 자전거 종주를 자축했다. 달콤한 럼주 한 잔과 함께.

본격적인 출발에 앞서 숙소 주인 내외와 기념 촬영.

'그간 험한 오르내리막길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잘 견뎌주었구나. 한국에 돌아가면 손과 발, 심지어 모세혈관까지 아무 탈이 없도록 모두 잘 손질해줄게. 많이 고생했으니 당분간은 푹 쉬고 봄이 돌아오면 또 함께 하자꾸나. 고맙다 나의 애마, 알초!'

최인섭 서울시청산악회 / cisalp@seoul.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