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은 누구와, 언제,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는가로 그 향과 맛이 결정된다. 카페인의 각성 효과가 필요할 때는 바에 서서 하얀 크레마가 포슬하게 올려진 뜨거움을 단 숨에 입 안에 털어넣게 되고, 나른한 오후, 친구와 테라스 자리에 앉아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하릴 없이 나누는 일상의 이야기에도 곁들여 진다. '세 집 건너 한 집이 빵집, 두 집 건너 한 집이 카페'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파리에는 카페가 많다. 그만큼 이들의 일상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문화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빛을 화폭에 담았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소장된 오르세 미술관 옆 카페에는, 미술관 휴관일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같이 한국인들이 모여 찻잔을 앞에 두고 열띤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유로자전거나라 가이드와 오르세 미술관을 보다 효과적으로 관람하기 위한 '작전'을 세우는 이들이다.
1986년, 1900년부터 36년동안 기차역으로 사용되던 오르세는 빛의 미술관으로 재개관했다. 아름다운 시각으로 파리와 그 주변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 작가의 사소한 일상이나 주변인물들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들, 생생한 에너지 전달을 통해 그 천재성을 발휘했던 조각가들의 작품이 모여서 바야흐로 '마음으로 보는 그림'들이 모인 미술관이 탄생한 것이다.
살아있는 색채와 당대의 사회,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푹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누군가의 일상, 누군가의 행복한 시선을 공유하는 듯, 감정이입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퐁피두 센터의 국립 현대 미술관에 비해서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라, 산책하듯 거닐다 보면, 어느새 1,2 층을 지나 5층의 전망대에 도착하게 된다.
높은 곳에 올라, 나보다 훨씬 작아진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작품을 샅샅이 훑어보는 사람, 한 작품 앞에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을 훔쳐보다 보면, 예술가들이 남긴 열정이 사람들 사이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으며 옛날 이야기를 속삭이는 노부부나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함께 '대화'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날은 괜스레 나의 행복감이 더한다. 지구 한켠에서 일어나는 이상하고 슬픈 이야기에서 잠시 벗어나 어떤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간듯한 기분. 인상주의 갤러리의 초입부에 있는 시계탑 전망대에서 저 멀리 자리한 몽마르뜨르 언덕의 샤크레 쾨르 성당을 바라보며, 거대한 시계바늘이 탁, 하고 자리를 옮기는 것을 봄과 동시에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대로의 시간 여행은 시작된다.
두 시간 남짓, 미술관에서 빛의 세계를 유영하고 나서면 저절로 배꼽 시계가 격렬하게 울려 온다. 파리에서 '지성인들의 마지막 발현지'로 손꼽히는 생제르망 데 프레. 맛있기로 소문난 식당에서 든든한 식사를 하거나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의 단골 카페였던 카페 레 두 마고 혹은 문학가들이 즐겨 찾았던 카페 드 플로르에서 그들의 발자취를 찾는 시간 또한 의미있다.
카페 마고에 앉아 사르트르의 '말'을 떠올린다. 독학으로 글 읽기와 쓰기를 깨우쳤던 그가 책을 통해 만났던 '세계'의 거대함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비슷한 형체로 나에게도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저서를 내가 파리에서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교 시절, 과제를 위해서 혹은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읽었던 것과는 달랐다. 어떤 목적으로서의 책읽기가 아니라, 단순히 '이런 글을 썼던 사람은 그 카페에서 어떤 풍경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라는 호기심으로 시작된 '작가의 단골 집에서 그 사람 떠올리기'의 효과. 그런 점에서 파리는 단연, 나에게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가장 매력적인 도시일 것이다.
1875년, 파리의 첫 번째 오페라가 탄생했다. 오페라 갸르니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사회 주도층이 되었던 부르주아들의 문화 거점지로 활용되며 화려함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제 2 재정을 대변하는 건축물이면서 당시에 함께 이루어졌던 파리 도시 재개발의 특징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주요한 곳이기에, 파리에서도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손꼽히는 시내 중심가이다. 백화점 로고가 프린트 된 쇼핑백을 들고 오가는 여행자들과 유니폼이나 정장을 입고 잠시간의 휴식을 취하는 현지인들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오전시간, 오르세 미술관에서 보았던 에드가 드가의 발레리나 소녀들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르고 가스통 루르의 '오페라의 유령'도 연상된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는 지금, 나의 시계는 한 번 살아본 적도 없는 1800년대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울 따름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 배경이 된 곳에 내가 발 딛고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주는 특별함. 주변을 에워 싼 오스만 양식의 건물들이 나란히 선 풍경과 그 시선의 끝으로 닿는 하늘이 유독 가깝게 여겨진다. 고개를 위로 들지 않아도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 바쁜 일상에서 찾는 작은 여유이자 큰 위로다.
과거 파리 시내 곳곳에 자리했던 최초의 실내 쇼핑 공간인 파사주(Passage)는 이제 특정한 동네로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추억 속의 공간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부르주아들의 쾌적한 쇼핑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으로 들어서며, 어째서인지 아련한 향수가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아마도, 흑백 사진이나 영화에서만 보았던 가스등의 불빛을 나도 모르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파사주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아케이드 상가의 형태를 한 실내같은 실외 공간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유리와 철근을 사용한 지붕을 얹어, 궂은 날씨에도 쾌적함을 유지하며 자신의 부와 영향력을 과시하던 이들이 모여들었던 '그들의 장소'. 발터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저서를 준비하면서 파리의 도시 역사를 누구보다 많은 자료와 함께 모아 남겼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가 남긴 글과 자료들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를 띄고 후대 사람들에게 '19세기의 문화 수도' 파리를 알리고 있다.
'가진 사람들'의 공간이었던 기억의 통로를 빠져나와, 시내 북쪽에 자리한 몽마르뜨르 언덕으로 향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파리를 헤매던 보헤미안들을 당장이라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샤크레 쾨르 성당은 에펠탑, 개선문과 더불어 파리에 대한 설렘을 더욱 돋궈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야트막한 언덕 길을 오르며 복작이는 상점가의 풍경은 마치 우리네 시장통을 걷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성당 앞 계단에서 내려다보는 파리의 전경은 한 눈에 마음을 사로잡는다.
저 멀리에 맞닿은 하늘과 땅. 하염없이 어딘가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곁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들. 낮은 건물들 위로 유독 가깝게 느껴지는 하늘 아래, 이곳을 오가는 수많은 이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 도시를 부유하는 공기 속에는 사람들의 행복과 고민이 녹아들어 있다. 오랜 시간을 지나 온 도시의 역사가 함께 숨을 쉬고 있기에, 우리는 곳곳에 스며든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영감을 얻기도,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지난 해, 투어 중 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하던 한 여자 손님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설명을 마치고 자유 관람 시간이 되었을 때 조심스레 다가가 여쭈었더니,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렇다며 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곁에 계시던 어머니가 대신 답을 주셨다.
"내가 십년 넘게 바깥 사람 병수발을 들었어요. 가족들 다 너무 힘들었지. 그런데 올 봄에 돌아가셨어. 그래서 얘가 나도 이제 좀 쉬라고 여행 데리고 나온 거에요. 애 아버지가 예전에 기자였거든. 해외 취재 나갔다가 돌아오면 거기서 보고 들은 얘기를 우리한테 들려주는데, 한 이십년 전에 들었던 얘기나 지금 내가 보는 거나, 똑같네. 변하지를 않은 것 같아..."
파리 시민들의 마음이 모여 탄생하게 된 특별 성당, 샤크레 쾨르를 곁에 두고 나누었던 사랑하는 가족의 이야기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가슴 속에 남겨지게 되었다.
몽마르뜨르 언덕의 또 다른 마스코트는 인상파 화가들의 후예를 자처하며 주변의 풍경을 자신만의 색채로 담아내는 화가들이다. 테르트르 광장을 빙 둘러싸고 그 주변에서만 감지할 수 있는 물감 냄새. 오가는 사람들을 개의치 않고 작업에 열중한 다국적의 화가들. 미술관에서 봤던 그림들도 이렇게 그려졌으리라. 이 광장의 분위기는 화가들의 앞치마에 묻은 물감의 색채만큼이나 다채롭다. 초상화를 남기기 위해 입꼬리를 올리고 꼿꼿하게 앉아 있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순수함이 가득하고, 그런 아이들의 바라보는 부모의 눈빛은 더할나위 없이 자애롭다.
미로같은 작은 길들이 이어져 만들어내는 평온함, 그 사이에 녹아든 19세기 보헤미안들의 이야기를 찾는 여정. 사람이 많았던 성당 앞이나 화가들의 광장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 내리락 이어지는 언덕의 구석 구석에서 발견하는 예술가들의 아틀리에. 그리고 그 앞에서 그들의 삶과 사랑과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불과 100여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유독 그들의 삶에는 사랑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슬퍼하다가 뒤를 따른 모딜리아니와 에뷔테른, 운명적 사랑을 만나 작업에 전환점을 맞이한 피카소와 올리비에, 해바라기처럼 오랜 믿음을 전했던 에릭 사티와 수진 발라동, 사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가수 달리다... 수많은 이들의 삶이 녹아있는 굴곡진 골목을 거닐며, 지금의 나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케 한다.
질문의 시간, 사유의 시간. 혹은 그저 웃고 즐기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 오후 내도록 '사랑해, 파리!', '아멜리에', '물랑 루즈', '미드 나잇 인 파리'까지... 영화 속 배경이 된 동네를 내가 주인공이 되어 산책하는 하루는 감성적이고 감각적이다.
그리고 이 시간여행의 끝은 바로, 파리, 프랑스, 유럽 여행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 에펠탑.
파리를 찾는 모든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환상과도 같은 이 탑을 마주했을 때 나를 휘어감았던 전율을 기억한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에 하얀 구름을 걸치고 내 눈 앞에 자리한 에펠탑은, 온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했다. 사진으로 이미 수차례 마주했기에 큰 감동은 없으리라 생각했던 나의 오산이었다. 1889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귀스타프 에펠의 300m탑이 1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 파리의 상징이 될 거라고 그 때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이토록 사랑하는 이들이 많아질 거라고 당대의 비평가들이 예견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정각에 5분동안만 반짝이는 에펠탑을 바라보며, 마법이 풀리듯 2014년으로 돌아온다. 10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둘러 본 파리는, 헤밍웨이의 말처럼 '날마다 축제'인듯 다채롭다. 잊고 있던 감성과 기억을 깨우치며 파리의 가장 로맨틱한 장소들을 함께 할 수 있는 하루. 까만 밤 하늘에 서서히 밝은 빛을 찾는 에펠탑을 바라보며, 나의 존재가 가장 환하게 빛나는 날은 언제일까를 가늠해본다. 물론 언제나 불투명한 미래에 가슴앓이 하는 청춘이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아직 환한 조명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며 나만 보이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가 빛을 내서 주변까지 밝힐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우리가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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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박송이 가이드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던 대학시절, 아시아 배낭여행을 떠났다. 인도 50일간의 배낭여행 이후, 동경했던 프랑스에 도착했고 삶과 사람, 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유로자전거나라 가이드가 되었다. 자유, 평등, 사랑 그리고 똘레랑스의 나라에서 적절한 자기애라는 모토로 자아와 세상을 새롭게 만나는 중이다. 검은 고양이 민식이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만남 중 하나.
사진: 박송이, 임현승
제공 : 유로자전거나라 (www.eurobik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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