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문화를 만나고...
내가 런던에 처음 도착한때는 1999년 가을, 이맘때였다. 당시 런던은 지금보다 조금더짙은 가을 빛에 물들어 있었다. 사실 나는 영국에 올 계획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행중 만난 많은 외국 친구들이 런던에 간다는것이다. 왜 갈까? 라는 궁금증으로 영국여행이 시작된거 같다. 원래의 계획은 이스라엘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로 갔다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으로의 뜻밖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비행기를 타고 영국 개트윅 공항에 도착했다. 다시 기차를 타고 런던 빅토리아역에 도착해 밖으로 나와보니 너무나도 화창한 가을날 아침이었다. 런던의 첫 느낌은 상큼했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 빅토리아 근처 숙소에 짐을 풀고 런던을 둘러보기 위해 명물중 하나인 빨간 2층 버스를 탔다. 버스가 2층이라는게 마냥 신기하고 신났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유산소 운동이 심혈관에 좋다는 사실을 2층 버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영국의 의학박사였던 모리슨 박사가 2층버스에서 일하는 기사들과 차장들의 심혈관을 조사 연구해 보니 가만히 앉아 있는 운전 기사들보다 계속 움직이는 차장들의 심혈관이 더 튼튼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분석하다 결국 계단을 자주 오르내리는 차장들의 직업적 특성 때문이라는걸 알게되었다. 이렇게 2층 버스로 인해 유산소 운동이 심혈관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나게 2층 버스안에서 런던거리를 구경하던중 사진에서 많이 보던 전광판이 보였다. 피카딜리 서커스였고 망설임 없이 버스에서 내렸다.
피카딜리 서커스라고 하면 'Circus서커스'라는 단어때문에 곡예를 하는 서커스단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Circus서커스' 단어의 뜻에는 '여러도로가 만나는 원형 광장, 교차로'의 의미도 있다.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는 5개의 도로가 만나는 원형(현재는 한쪽은 막혀있다)교차 지점인 것이다. 이곳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나의 눈에 들어온건 큰 광고판이었다. 세계 여러기업들과 우리나라 기업들이 광고를 하고있는 글로벌 마케팅의 장인 이 광고판은 낮에도 뛰어난 선명도를 자랑하며 보행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내가 처음 런던에 왔을때만 해도 네온관으로 구성되어있던 광고판이 현재는 LED 조명으로 바뀌어 전력 소비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와 환경적 영향을 25% 줄였다고 한다.
피카딜리 서커스 주변은 런던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지구가 형성되어 있는 번화가의 중심지이자 문화의 중심지로 여겨진다. 이지역을 포함한 런던 중심지의 서쪽지역은 '웨스트엔드'라고 불린다. 웨스트엔드에는 런던극장협회에 속해있는 극장 50여개가 모였있는 곳으로서 영국 공연계를 상징하며 뉴욕 브로드웨이와 함께 세계 뮤지컬의 양대 산맥으로 손꼽힌다.
↑ 출처: 위키드 영국 공식 홈페이지
사실 뮤지컬 하면 뉴욕의 브로드웨이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뮤지컬 4편 <캣츠>,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사이공>이 모두 런던의 웨스트엔드가 고향인 작품들이다. 나도 당시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뮤지컬을 알게되었고 5파운드를 지불하고 발코니석 티켓을 구매했다. 공연내내 무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바닥이 돌고 뒤집히면서 건물 옥상이 되기도 하고 배를 띄울수 있는 호수가 되기도 하고 극장의 천장에서는 샹들리에가 떨어지기도 했다. 첫 뮤지컬을 본 소감은 감동보다는 충격이었다.
↑ 출처: 오페라의 유령 공식 홈페이지
당시 15년 전까지만 해도 런던거리에서는 뮤지컬 전단지를 나누어 주며 호객 경쟁이 심했다. 나도 호객꾼들 때문에 오페라의 유령을 알게되었고 보게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는 관람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굳이 거리에서 호객을 하지 않아도 런던에 오면 뮤지컬을 보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물론 지금도 뮤지컬 광고를 많이 하고 있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곳곳에서 뮤지컬 광고판을 볼수 있고 지하철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광고들 대부분이 뮤지컬과 연극 공연 혹은 전시에 관한 것들이다. 영국이 이런 공연문화로 벌어들이는 연간 수익은 실로 엄청나다고 한다.
우리나라 현대 뮤지컬의 시작을 알린건 1960년대 '살짜기 옵서예'라고 한다. 그 이후로 우리나라의 뮤지컬이 많은 발전을 했음을 실감하게하는 대목이 있다. 바로 웨스트엔드에서 한국인 뮤지컬 배우 홍광호를 만나볼수 있다는 점이다. 배우 홍광호는 올해 5월부터 다시 시작한 <미스 사이공>에서 '투이'역을 연기하고 있다. 흥행 제작자로 통하는 카메론 매켄토시가 한국에 방한해 직접 오디션을 통해 발탁했다고 한다.
↑ 출처: 미스사이공 영국 공식 홈페이지
또한 얼마전까지 네덜란드 교포 2세 뮤지컬 배우 전나영이 웨스트엔드 뮤지컬 2013년 버전 레미제라블에서 판틴역으로 열연을 하였다. 한국계 배우가 주연급으로 처음 런던 무대에 올라 매우 화제가 되었었다.
↑ 출처: 레미제라블 영국 공식 홈페이지
런던 못지않게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 연극 등이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다. 문화가 국력인 시대인 현대 사회에 우리만의 독창성 있는 콘텐츠를 발굴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웨스트엔드, 브로드웨이에서 우리나라 배우들과 공연들을 자주 만나보기를 희망한다.
정치를 만나고...
탬즈강변에는 약 96m의 시계탑 '빅 벤'이 서있다. 원래 시계탑 종에 붙여졌던 이름은 그레이트 벨이었다. 하지만 건설 책임자 '벤자민 홀'에서 유래한 '빅 벤'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통용 되어왔다. 그리고 201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여 공식 명칭이 '엘리자베스 2세 타워'로 바뀌었다.
'빅 벤' 시계탑이 붙어 있는 신고딕양식의 건물은 1834년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 지은 국회의사당 건물이다. 국회의사당의 반은 상원의원의 회의실로 나머지 반은 하원의원의 회의실로 사용한다. 하원의원의 회의실이 있는 건물 앞에는 올리버 크롬웰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1642년 영국에서는 왕당파와 의회파간의 내전이 일어났다. 당시 찰스 1세는 절대왕정을 꿈꾸는 카톨릭 옹호자였다. 독재통치를 시도하고 카톨릭이외의 종교 탄압을 하자 불만이 쌓인 의회파에서 결국 혁명을 일으켰다. 의회파가 승리하고 찰스 1세는 올리버 크롬웰의 주장에 의해 재판을 통해 사형이 선고되고 참수 당한다. 이후 크롬웰은 공화국을 선포하고 호국경의 자리에 오른다. 호국경은 현대의 대통령과 같은 지위였으며 호국경이된 크롬웰 또한 찰스1세처럼 의회를 폐쇄하고 청교도 정신인 성서주의에 의해 성탄절을 금하였다. 이로 인해 크롬웰에 대한 평가는 크게 상반된다. '왕을 처형한 잔혹한 독재자다 혹은 귀족과 젠트리들로 이루어진 당시 의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런 의회를 폐쇄한 크롬웰은 경건한 혁명가이다' 라고 말이다. 국회의사당의 크롬웰 동상은 한손에는 검을 다른 한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다. 그리고 크롬웰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길건너편 세인트 마가렛 교회 건물에 누군가의 얼굴이 작게 조각되어 있다.
바로 그가 사형시킨 찰스 1세이다. 극명한 대립을 했던 역사속의 두 인물을 서로 마주보게 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크롬웰이 진정한 영웅이었는지 독재자였는지 결론을 내릴수는 없지만 의견에 따라 크롬웰의 동상 모습도 다르게 보일 것이다. 혹자에게는 크롬웰이 찰스를 향해 사죄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으로 보일것이며 다른이에게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자는 왕일지언정 처단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보일 것이다. 혹은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하며 국민들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달라는 의미로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술을 만나다.
나는 미술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내셔널 갤러리를 처음 들어간 이유도 화장실 때문이었다. 런던에 공중 화장실은 많지 않고 미술관은 무료이고 그렇게 몇번을 화장실때문에 찾아갔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가기 시작한건 가이드를 준비하면서 부터였고 지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고 설레이는 장소이다.
내셔널 갤러리는 1824년 55점의 기증과 유증된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후 내셔널 갤러리에서 구입한 작품들이 늘어나며 현재 약 2,3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소장품 대부분은 수장고가 아닌 모든 사람들이 즐길수 있도록 전시되고 있다.
이 수많은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마다 품고 있는 사연이 궁금해진다. 누가 왜 그렸을까? 언제 그려진 걸까? 당시의 사회상은 어떠했을까? 이런 궁금증에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가게된다.
다른 유럽국가에서는 르네상스의 3대 거장들이 탄생하고 바로크의 대가들이 명성을 떨치고 있을때 사실 영국에서는 이렇다할 화가가 없었다. 당시 영국은 화가들에 대한 후원이 적었고 다른 유럽국가의 예술품들에 매료되어 있었기에 자국의 화가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18세기 런던 출신의 윌리엄 호가스는 그림으로 세상을 풍자하는 화가이자 판화가로 활약을 한다. 그는 당시 영국의 사회상, 귀족의 허세, 탐욕등을 신랄하고 날카롭게 풍자하였다. 그의 작품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유행에 따른 결혼>이다. 이 작품은 당시 상류층들간 유행하던 정략결혼을 주제로 6점의 연작으로 그려졌고 그림들은 마치 연극처럼 전개된다.
6점의 연작중 <계약결혼>은 첫번째 편이다. 그림의 장면은 몰락한 귀족의 아들과 신흥부유층으로 돈이 많은 상인의 딸이 중매로 결혼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모습이다. 돈이 있는 상인은 신분상승을, 백작은 잃었던 재력을 되찾기 위해 정략결혼을 하는것이다. 양가의 아버지는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몰락한 백작은 뿌리깊은 가문의 족보를, 돈이 많은 상인은 금화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부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결혼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는 이 결혼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 사이에 걸려 있는 그림속의 메두사는 앞으로 다가올 불행을 암시하는 듯 하다. 이어지는 5점의 그림은 부와 명예의 맞교환을 전제로 맺어진 정략결혼은 결국 탐욕과 불륜의 과정을 거쳐 파경을 맞게된다는 결과로 이어진다.
내셔널 갤러리 설립자들은 과거의 명화가 사람들에게 훌륭한 교육자료가 될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예술의 경이를 접하게 되면 서로 자유롭게 교류하며 매우 긍적적인 영향을 미칠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누구나 미술관에 들어올수 있도록 어떤 격식도 없었으며 입장료도 받지 않았고 이 정책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후원과 기부금은 운영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소장품의 4분의 1은 개인으로부터 기증받은 작품들이다.
미술관 교육부서에서는 어린이들부터 성인들까지 참여 할수있는 무료 강의, 워크숍 등의 적극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미술관의 설립 취지가 현재까지도 잘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국립 미술관은 예술을 통해 누구나 삶이 개선되고 풍요로워 질수 있도록 도덕적, 지적 교육 수단을 제공하는 문화교육 공간으로 의무를 다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예술 작품을 접함으로써 최상의 즐거움을 경험한다. 예술작품은 나에게 다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황홀한 행복감을 맛 보게 한다. "
- 알버스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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