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위스 서부 작은 도시 기차여행
해발 1960m의 에모송 호수로 향하는 열차. 놀이공원에서나 볼 법한 꼬마열차가 깎아지른 절벽 위를 느릿느릿 달린다.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알프스의 풍경을 담느라 겁 먹을 틈이 없었다.
스위스 서부 지역을 훑었다. 서남쪽 끄트머리의 마티니(Martigny)를 지나, 너른 고원의 샤르메(Charmey), 중세 도시의 매력을 품은 그뤼에르(Gruyeres) 등을 누볐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알프스의 매력이 스위스 서부의 소도시 곳곳에 숨어 있었다. 융프라우(Jungfrau)·취리히(Zurich)·체르마트(Zermatt) 등 내로라하는 관광 명소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스위스 서부 소도시로 가는 길. 인천공항에서 프랑스 파리를 경유해 13시간 만에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내렸다. 기차로 다시 1시간 이동해 루체른(Luzern)에서 ‘골든패스 라인’에 올랐다. ‘빙하특급’ ‘베르니나특급’과 함께 스위스를 대표하는 테마 열차 노선이다.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빙하특급(생모리츠∼체르마트)·베르니나특급(생모리츠~티라노)과 달리 골든패스 라인은 평탄한 중부지역을 횡단한다. 국토 중앙의 루체른을 떠나 서쪽의 호반 도시 몽트뢰(Montreux)까지 줄곧 완만한 초원과 너른 호수를 끼고 달린다. 알프스의 장대한 절경은 없지만 궁극의 평온함을 주는 구간이다. 그러니까 골든패스 라인은 서부로 향하는 가장 낭만적인 방법이었다.
열차는 천천히 달렸다. 몽트뢰까지는 191㎞, 약 5시간 거리였다. 약 420㎞ 거리의 서울~부산을 2시간 반 만에 주파하는 KTX에 비하면 훨씬 느림보였다. 하나 그 느긋함이 되레 반가웠다. 푸른 초원과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 에메랄드빛 호수 등 차창 밖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승객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몇몇은 카메라를 들었고, 몇몇은 풍경을 배경 삼아 와인을 즐겼다. 꾸벅꾸벅 조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해발 900m의 구릉지대 츠바이짐멘(Zweisimmen)에서 해발 390m의 몽트뢰에 이르는 마지막 구간이 특히 장관이었다. 드넓은 레만(Leman) 호수를 내려다보며 열차는 서서히 종착역을 향해 내려갔다.
이튿날 마티니에서 본격적인 스위스 서부 여행이 시작됐다. 프랑스와 어깨를 맞대고 있는 국경도시 마티니는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프랑스 샤모니몽블랑(Chamonix-Mont-Blanc)으로 향하는 산악열차 ‘몽블랑 익스프레스’의 출발지로 그나마 알려져 있을 따름이다.
에모송(Emosson)이라는 호수로 향했다. 스위스에서도 남다른 비경으로 꼽히는 장소다. 우선 위치부터 남다르다. 에모송은 해발 1960m 산골짜기 안에 자리해 있다. 르 슈발 블랑(2831m), 르 페홍(2674m) 등 고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호수를 형성했고, 이 호숫물을 활용해 1925년 수력발전 댐을 세웠다고 한다. 한라산(1947m) 높이에 거대한 댐을 놓은 셈이다. 무엇보다 에모송 호수까지 가는 방법이 독특하다. 세 번 열차를 갈아타야 에모송을 만날 수 있다.
“가장 독특하면서도, 아찔하고, 신나는 열차 노선이죠.” 마티니 관광청 직원 파비앙이 말했다. 우리는 해발 1125m의 르 샤틀라르역(Le Chatelard VS)에 내려 첫 번째 케이블카를 탔다. 선로는 산등줄기를 따라 끝없이 뻗어 있었다. 비스듬한 정도가 아니라 직각에 가까운 경사였다. 파비앙이 87도의 경사가 적힌 푯말을 손가락질했다.
해발 1825m 고지에 케이블카가 다다르자, 이번엔 열차가 기다렸다. 놀이공원에서나 볼 법한 2m 너비의 꼬마열차였다. 열차는 깎아지른 벼랑을 따라 난 선로를 느릿느릿 달렸다. 열차가 꼬불꼬불한 굽이를 돌 때마다, 구름 사이로 알프스의 설봉이 시야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꼬마열차는 에모송 댐 하부에서 멈춰 섰다. 저수량이 2억2700만㎥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엄청난 몸체였다. 댐 하부에서는 미니케이블카를 탔다. 전망대에 오르니 호수와 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에모송 댐을 따라 난 길을 따라 걷는데 어느 순간 구름이 걷혔다. 저 멀리 육중한 크기의 설산이 보였다.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07m)이었다. 바람이 거세 걸음을 멈췄다. 몽블랑의 만년설이 눈앞에, 거대한 에모송 호수가 등 뒤에 있었다. 맑고도 시원한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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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뤼에르·샤르메 … 서부 구석구석
이튿날 마티니 북쪽 방향으로 움직였다. 일반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그뤼에르에 도착했다. 스위스 3대 치즈 중 하나라는 ‘그뤼에르 치즈’의 고장. 하지만 치즈를 잘 모르는 동양의 여행자에게는 그저 고요한 시골의 모습이었다.
초원 위로 우뚝 솟은 그뤼에르 성이 특히 아름다웠다. 13세기 지어진 이 성은 드는 길부터 로맨틱했다. 언덕 위 마을로 들어간 다음 중세풍의 아담한 카페거리를 거슬러 올라야 성에 닿을 수 있었다. 카페거리 바깥쪽은 그뤼에르 지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곽길이었다. 귀족 가문이 대대로 살았다는 성 안에는 옛 가구와 갑옷, 방어시설 등 유물이 빼곡했다. 주민 110명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마을은 국가주요유산으로 지정돼 있어 자동차가 드나들 수 없다. 기꺼이 걸을 준비가 된 사람만 찾기 때문에 언제나 조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라고 한다.
중세풍 거리 풍경으로는 프리부르(Fribourg)의 구도심도 빠질 수 없었다. 사린느(Sarine) 강이 휘감아 도는 구도심은 도시 속 섬처럼 생겼다. 스위스 수도 베른(Bern)의 풍경과 비슷했다. 12~15세기 지었다는 붉은 지붕의 건축물, 낡은 목조 다리와 성문 등이 중세 도시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서둘렀다. 기차에서 일반 버스로 한 번 갈아타고 1시간 만에 샤르메를 방문했다. 800m 고원에 자리한 산골 마을로, 소규모 호텔과 레스토랑을 빼고는 사방이 초원이었다. 샤르메는 이번 여정에서 가장 기대가 큰 여행지였다. ‘데잘프(Desalpe, 고산지대 목장에서 내려오는 것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라 불리는 소몰이 축제 때문이었다.스위스 목동은 여름이 오면 소떼를 이끌고 알프스 고산지대로 올라간다. 그리고 4달간 소와 함께 생활하며 치즈를 만든다. 가을이 시작되면 날을 정해 소떼와 함께 일제히 마을로 내려온다. 소몰이 축제는 마을로 돌아오는 목동과 소를 위한 일종의 환영식이다. 축제는 매년 9월 마지막 토요일 단 하루만 열린다. 마침 이날이 그날이었다.
올림픽 영웅의 퍼레이드도 이처럼 열정적일까. 오전 9시부터 샤르메의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아직 소떼는 보이지 않았다. 도로 양옆에는 마중나온 축하 행렬로 끝이 없었다. 누군가는 꽃을 흔들고, 누군가는 목동에게 건넬 술을 정성껏 쥔 채 소떼를 기다렸다.
“스위스가 자랑하는 치즈와 초콜릿 모두 우유가 중요한 재료예요. 소가 없으면 치즈도 초콜릿도 없죠. 저들에겐 소가 그만큼 소중한 의미예요.”
안내를 맡은 말린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 마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커다란 꽃 장식과 쇠방울을 목에 단 소떼가 늠름한 모습으로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소들이 발을 옮길 때마다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스위스 전통 의상을 입은 목동과 알록달록한 앞치마를 두른 소녀도 뒤를 이었다. 긴 행렬이 끝나도록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주인공의 귀환으로 마을은 금세 축제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알펜호른(알프스의 전통 목관악기) 연주자들이 소떼의 행진 소리에 화음을 맞췄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장터엔 다양한 치즈와 빵, 수제 소시지 등 마을에서 생산한 먹거리가 즐비했다. 직접 구운 쿠키를 들고 나와 파는 아이들도 보였다. 어느새 내 손에도 치즈와 와인이 들려 있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웠다.
■여행정보
「스위스에서 여러 도시를 여행하려면 ‘스위스 트래블 패스(Swiss Travel Pass)’를 이용하는 게 편리하다. 티켓 한 장으로 철도·버스·유람선 등의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각종 케이블카와 박물관 할인 혜택도 포함돼 있다. 스위스 트래블 패스는 기간별로 3·4·8·15일권 네 종류가 있다. 어른 기준 3일권(2등석)은 210스위스프랑(한화 약 24만원)이다. 무료 애플리케이션 ‘SBB Mobile’도 유용하다. 열차·버스·케이블카 등 대중교통 길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다. 자세한 여행 정보는 스위스정부관광청 홈페이지(myswitzerland.com/ko)를 참고하면 된다.」
글·사진=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