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 진 ♡/세계여행가이드

in 스위스 : 알프스 풍경 속에서 살아볼까

거울속의 내모습 2017. 1. 10. 23:27

유럽에서 현지인이 되어 살아보기’를 목표로, 겁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부부. 그 나라의 진짜를 경험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것은, 이름마저 낯선 ‘우프(WWOOF)’였다. 8개월 동안 8개국을 누비며 느꼈던 부부의 우여곡절 시골생활, 그 마지막 이야기를 전한다.

 

 

+ 아름다운 스위스로

암스테르담에서 비행기를 타고 유럽을 여행한 한국 사람이면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그 곳, 스위스로 향한다. 알프스의 멋진 풍경을 즐기면서 우프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땅덩어리가 작으니 일하면서 쉬는 날 여행해도 충분할거라 생각을 하고 호스트들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인기 관광지인 루체른과 인터라켄 주변은 이미 꽉 차 있거나 노동 강도가 심해 보인다. 가파른 초지에서 건초를 수확하는 일이 많은데, 사진만 봐도 겁이 난다. 결국 스위스 북서쪽 ‘Courtelary’라는 작은 마을로 가게 되었다. 유명한 관광지를 가기는 힘들겠지만 진짜 스위스를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해본다.

해질 무렵 기차역에 내리니 백발의 여인이 우리를 향해 밝게 인사를 건넨다. 호스트 ‘프리스카’이다. 염색한 것도 아닌데 저런 멋진 색이 나오다니. 할아버지, 할머니만 백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다. 기차역에서 10분을 걸어가니 우리가 앞으로 열흘간 지낼 집이 보였다. 키 큰 남자가 나와 ‘앤디’라며 자신을 소개한다.

300년 됐다는 이 집에는 호스트 가족과 다른 두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현관과 거실, 세탁기를 함께 사용하는 공동주택이다. 3층으로 올라가니 탁구대와 드럼, 미니 바(운영하진 않지만) 등이 있는 넓은 공용 홀이 나오고, 한 쪽에 있는 문을 여니 생각지도 못한 멋지고 깨끗한 공간이 있다.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벽면 책장에는 전 세계의 동화책이 꽂혀있고, 작은 공간이지만 쇼파와 책상, 화장대, 난로 등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다. 계단을 타고 올라오면 아늑한 침대가 나온다. 책장, 침대, 벽 등 모든 공간을 앤디가 손수 디자인하고 만들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기가 우리 방이라고?”

숙소는 이번이 최고 중 최고다! 알고 보니 B&B(Bed & Breakfast) 손님을 위해 만들어 놓은 방이란다. 마침 비어있었던 덕분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아니면 밖에 있는 이동식 주택에서 잤어야했는데 운이 좋았다. 동화책으로 가득 찬 방에서 잠을 자서일까? 이 방에서 영글과 나는 다른 어느 곳에서 잘 때 보다 꿈을 더 많이 꿨다.

 

+ 만능재주꾼 앤디

날이 밝으니 드디어 주변이 보인다. 마을 양쪽으로 산줄기가 길게 이어져 있는 푸르디 푸른 풍경이다. 산 밑으로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고 그 사이에 호스트의 집이 있다. 아쉽게도 눈이 쌓여있는 높은 산들은 보이지 않는다. 4월말이지만 산간 지역이다 보니 아직 초봄의 을씨년스러운 날씨다. 따뜻한 벨기에에서 추운 곳으로 돌아오니 농사일은 또 도돌이표다. 앤디의 텃밭도 이제서야 작물 심을 준비에 들어간다. 텃밭이라 해봤자 잔디밭 중간 중간 손바닥만 한 게 고작이니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다. 하루에 4시간, 그것도 원하는 시간에 일하면 된다고 하니 휴가나 다름이 없겠다.

전 세계의 이솝우화로 가득 찬 방. 매일 밤 좋은 꿈을 꿀 것 같다.

공용 거실, 누구나 자유롭게 공간을 쓰면 된다. 이곳에서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안네의 일기’ 영화를 봤다. 

 

잔디밭에는 반달곰같이 목에 흰 무늬가 있는 검은 오리와 닭 세 마리가 살고 있다. 닭 한 마리도 화려한 빛깔을 자랑한다. 들어보니 멸종 위기인 품종이라고 한다. 숙소를 멋지게 꾸며놓은 것처럼 군데군데 아담한 나무들과 꽃이 심어져 있는 정원 역시 남다르다. 우리의 작업은 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있는 땅의 잡초를 제거하고 블랙베리를 심는 것이다. ‘이 정도는 껌이지’ 했던 일인데 생각보다 진행이 더디다. 몇 년에 걸쳐 뿌리를 깊게 박은 넝쿨들을 제거해야 하는데, 좀처럼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한나절 내내 애를 써 보았지만, 제자리이다.

일을 하던 중 잔디밭 한 쪽에 있는 커다란 나팔모양 물건을 발견했다. 무언지 물어봤더니 확성기를 만드는 것이란다. 한 개를 더 만들어서 반대쪽에 놓으면 멀리서 서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알프스 양치기들이 통신 수단으로 사용했었단다. 우리가 있는 동안 앤디는 나머지 한 개를 만들어서 딸 마라마에게 선물했다. 정말 반대쪽에 서면 멀리서도 상대방이 작게 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치 초등학생 때 종이컵을 실로 이어 만든 전화기 같다. 신기한 선물에 마라마는 신이 났다. 장난감이며 집이며 모든 것을 직접 만들어줄 수 있는 아버지를 둔 딸은 얼마나 행복할까.

앤디의 재주는 그 뿐만이 아니다. 거의 매일 집에만 있는 앤디를 보며 B&B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건가 생각했는데 그의 직업은 따로 있었다. 여름에는 바깥에 있는 카라반을 가지고 독일, 프랑스 등지를 다니면서 연극과 서커스 공연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 방에 있던 동화책들도 극본을 만들기 위해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 단순히 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극을 기획하고, 악기도 연주하고, 마술쇼, 서커스 등 다양한 형태로 공연을 한다. 프리스카도 연극을 하면서 만나게 되었단다. 앤디는 자기네 공연이 늘 관객들로 가득 찬다면서 여름에 기회가 되면 보러 오란다. 여름 한 철 공연을 하면 남은 기간동안 민박만 운영해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정도라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이렇게 여유롭게 사는 모습이 부러울 따름이다. 물론 여기까지 오기에 피나는 노력이 있었을 테지.

앤디의 작은 앞마당


+ 융프라우 대신 뒷동산

스위스에서 우프를 하겠다고 결정했던 것은 워낙 물가가 비싼 나라라 여행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우프를 하면서 쉬는 날마다 이곳저곳을 여행해 볼 참이었는데, 그것 역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관광지가 많은 지역이었다면 가능했겠지만.

문제는 살인적인 교통비다. 20분 거리의 도시 비엘(Biel)까지 가는 데에도 인당 왕복 11프랑, 우리 돈으로 1만5천원 정도이다. 주요 관광지인 루체른이나 인터라켄이라도 가려면 두 시간도 안 되는 거리인데 인당 교통비만 왕복 10만원을 넘게 지출해야 한다. 그렇다고 KTX 같은 고속열차도 아니니 더 억울하다.

스위스는 지방별 중심도시를 기준으로 존(Zone) 요금을 적용하고 있다. 우리가 있는 존에서 목적지까지의 1일권(Day-pass)을 구입하면 24시간동안 그 경로 안에 속하는 존의 모든 교통수단(철도, 시내버스, 포스트버스)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즉, 짧은 거리 이동이 많을 경우에는 나름대로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가난한 우리는 이런 이유 때문에, 쉬는 날 그저 동네 뒷산에 올라가거나, 같은 존에 속한 동네만 구경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여행은 우프가 끝나고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하기로 했다.

동네 뒷산에 열심히 올라갔지만 경사면에 비스듬히 쭉 뻗어 나 있는 길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비는 왔다 갔다 하는데 꼭대기는 나올 생각을 안 해서 결국은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와야만 했다. 산 위는 온통 수선화 밭이다. 여름에는 시원한 이 곳 산 위에서 가축들의 풀을 먹이고, 겨울에는 마을 주변의 목초지에서 풀을 먹인단다. 여기 있는 집들은 여름에만 사용하는 용도인 것이다. 스위스에는 1층에 축사가 같이 있는 전통 가옥이 많았는데, 우리가 머무는 집도 원래 1층의 절반은 축사였단다. 지금은 물론 가축과 한 집에서 생활하지 않고 별도로 축사 건물을 짓는다.

동네에 있던 무인 상점. 마트가 닫아도 언제든 달걀과 직접 만든 빵, 치즈 등을 구입할 수 있다.  

 

높은 산이 없는 이곳은, 지금이 여행하기에 가장 애매한 시즌인 것 같다. 눈이 많이 녹은 상태라서 겨울 스포츠를 즐길 수 없지만, 길이 아직 위험해서 산 정상까지 차가 운행하지도 않는다. 관광안내소에는 트래킹코스와 다양한 액티비티에 대한 정보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부 무용지물이다. 굳이 구경할 것이 있다면, 치즈 공장과 초콜릿 공장이다.

늘 달콤한 냄새를 몇 백 미터 거리까지 풍기고 있던 초콜릿공장은 아쉽게도 개인적으로 투어를 할 수는 없었다. 공장 앞 가게에서 초콜릿 몇 개를 사고 옆 동네까지 걸어가서 ‘Tete De moine’ 치즈 공장에 들어가 보았다. 처음 들어본 치즈 이름이지만 스위스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치즈란다. 생김새가 몽크(수도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몽크 치즈’ 라고 불리는 이 치즈는 100% 주변 지역의 농가들에서 받아 온 우유로 치즈를 만든다. 우리가 있는 마을에도 목장마다 몽크 치즈의 상표가 붙어있었다. 치즈 공장 한 편에는 숍이 있어서 치즈는 물론 치즈 요리에 사용되는 도구들도 팔고 있었다.

신세계를 발견한 우정은 조그만 가게에서 하나하나 꼼꼼히 보느라 정신이 없다. 나름 제대로 된 치즈를 먹는다고 자부하는 우리도 한국에서는 스트링치즈, 모차렐라 치즈밖에 먹어보지 못했는데, 여기는 치즈의 종류는 물론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공장 내부도 훤하게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치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남들 다 가는 여행지는 갈 수 없었지만, 시골 여행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스위스에서 2주를 보내며 우리의 여행도 마무리가 되어간다.

 

땅 한 평 가지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8개월 동안 농부가 되어 온전한 자유와 행복을 누렸다. 한국을 떠날 때 응원의 목소리도 많았으나 “고작 잡초나 뽑을 거면 한국에서 농활을 하지 왜 만리타국에 가서 고생이냐”, “돈도 안 받으면서 뭐 하러 그런 곳까지 가서 일을 해?”라며 걱정하는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남들이 걱정하는 것들은 우리에겐 오히려 즐거움이 되었다.

여행을 하면 사진 한 장으로만 남게 될 예쁘고 독특한 집에서 살아볼 수 있다. 남들이 그 지역의 대표적인 음식을 찾아 식당을 전전할 때, 우리는 그들의 집에 편안하게 앉아 식구들과 함께 진짜 그들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음식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식사에 대한 태도를 엿본다. 요리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덤이다. 함께 일하고, 탁구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일상을 공유하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친구가 되어간다.

돈이 없더라도 서로의 도움을 주고받으며 얼마나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금전적 관계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