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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노무현의 나라 .& 2.'송민순 회고록 파문' 진상규명 불가피하다 .&3 . 風前燈火 신세의 대한민국

거울속의 내모습 2016. 10. 20. 23:18


[박제균의 휴먼정치]노무현의 나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에 불만이 있다. 나도 불만이 있다. 그런데 인생이 불만스러운 이유를 남 탓으로만 돌리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한 발짝 더 나가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대한민국 탓이라고 돌리면 앞이 안 보인다. 그는 ‘당신의 삶이 힘든 것은 반칙과 특권이 판치는 대한민국 탓’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이. 그때부터 국가가 성립하고 존속하기 위해 필요한 질서의식과 권위체계가 바닥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회고록 파문도 盧의 유산 

 돌아보면 공권력이 시민의 발아래 깔린 촛불시위부터 오늘의 백남기 부검 영장 집행 거부 사태까지, ‘기존 질서는 얼마든 무시해도 좋다’는 노무현의 유산이라고 나는 본다. 대선 후보 시절 그가 “반미주의자면 어떠냐”고 들이받은 것은 차라리 신선했다. 하지만 집권 이후에도 ‘큰 정부 맞다. 큰 정부면 어떠냐’ ‘코드인사면 어때’라며 정당한 비판도 정면으로 맞받았다. 정당한 비판이, ‘팩트의 힘’이 먹히지 않는 작금의 세태는 노무현의 또 다른 유산이다.

 노 전 대통령은 국가 존망이 걸린 대북정책에서도 ‘북한으로서 핵은 자위수단’이라느니, ‘북한은 테러를 자행하거나 지원한 일이 없다’ 같은 황당한 북한식 주장을 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회고록으로 촉발된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기권 ‘대북 결재’ 의혹도 따지고 보면 대통령이 되고도 반미친북 운동권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무현의 산물이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논란의 핵심인 ‘결의안 기권 전에 북의 의견을 물었느냐’에 대해선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다. 친노(親盧) 인사들과의 대책회의에서 나온 ‘역할 분담’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러니 아직도 문 전 대표를 두고 ‘노무현의 아류(亞流)’라는 말이 가시질 않는다. 

 정치권에는 ‘문재인의 딜레마’란 얘기가 있다. ‘문재인이 본선(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려면 노무현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노무현을 극복하면 예선(당내 경선)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대 대선을 돌아보면 본선 경쟁력이 결국 당내 경선의 당락을 갈랐다. 문 전 대표가 야권 유력 대선주자답게 ‘친노의 고용사장’ 소리나 들었던 2012년 대선의 구각(舊殼)을 깨려면 송민순 회고록 파문에서도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 자리는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단적으로 그는 세상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대통령의 몫이 아니다. 시대의 정신적 스승이나 종교 지도자의 몫에 가깝다….” 2012년 7월 내가 쓴 칼럼의 서두다. ‘실패한 대통령’ 노무현은 2009년 5월 부엉이바위 아래로 몸을 던짐으로써 ‘종교 지도자’로 부활했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참여정부는 절반의 성공도 못했다.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실패와 좌절의 기억”이라고 실토했다. 그럼에도 ‘노무현의 실패’를 말하는 것은 금기나 다름없다. 노 전 대통령 가족이 받은 수십억 원의 금품은 환수되지 못했다. 그래도 감히 그걸 입에 올릴 분위기가 아니다.


文, 자기 목소리 내야

 인간 노무현의 비극은 안타깝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을 부정했던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이 나라의 저력을 인정했어야 옳다. 대통령이라면 보다 자랑스러운 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해야 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7년여. 이제 그를 놓아줄 때가 됐다. 그의 그림자에서도 벗어날 때다. 노무현의 유령과 싸우는 한 우리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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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순 회고록 파문' 진상규명 불가피하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송민순 회고록’ 파문과 관련해 그제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모든 것을 토론으로 결정한 노무현 정부야말로 건강한 정부였다”며 “박근혜 정부는 노무현 정부를 배우기 바란다”고 주장했다. 노 정부가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이라는 중대 인권 문제에 대해 가해자인 북한에 물어보고 ‘기권’을 결정했는지가 논란의 핵심인데 뜬금없이 청와대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거론한 것이다. 논지(論旨) 이탈로 본질을 피하려는 궤변이다. 

 노 정부 시절 청와대 참모와 장관들 중에는 친북 성향이 많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은 2007년 정상회담 때 김정일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고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북의 경고를 무시한 우리 군의 사격훈련 때문이라고 일본 잡지에 썼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북의 인권유린은 명확한 근거가 없다” 같은 발언을 했다. 이런 대북관을 지닌 사람들이 주무장관 의견도 무시한 채 토론으로 결정한 것을 건강한 정부라고 보긴 어렵다. 

 송민순 회고록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북한에 묻지 말고 찬성으로 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더민주당 김경수 의원은 어제 “기권을 결정한 상태에서 표결 직전 북에 통보했다”고, 우상호 원내대표는 “문 전 대표는 당초 찬성이었다”고 회고록 내용과 다른 주장을 폈다. 정작 문 전 대표는 이런 얘기들을 언급하지도 않는데 대리인들이 나서 문 전 대표 방어를 위해 진실 공방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그렇다면 당시 청와대 회의록을 공개할 용의가 있는지 묻고 싶다. 회고록에는 남북 10·4공동선언에 문제의 소지가 큰 ‘3자 또는 4자 정상의 6·25 종전 선언’이란 문안도 북한의 요구에 따라 그대로 들어갔다는 내용도 있다.

 문 전 대표는 페이스북 글에서 “전쟁보다 나쁜 평화에 가치를 두겠다”고도 했다. 전 세계 어느 역사에도 힘없는 나라가 평화를 공짜로 얻은 적은 없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간 햇볕정책을 폈음에도 북한은 인권 개선은커녕 5차 핵실험까지 마쳤고 어제 또 무수단미사일을 발사했다. 내년 대선 때까지 6차, 7차 핵실험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문 전 대표와 더민주당은 11년간 북한인권법 통과에 반대했고, 대남적화를 노리는 북의 핵·미사일 개발을 규탄하기보다 ‘남북 대화’ 운운하면서 우리 정부 공격에 더 열을 올렸다.

 회고록 파문을 둘러싸고 여야의 공방전이 치열하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북과의 내통·모의’라고 주장했고 더민주당은 ‘색깔론’ 운운하면서 미르와 K스포츠 재단 의혹을 덮으려는 술책이라고 맞불을 놓았다. 2012년 대통령선거를 전후해 장시간 여야가 치고받았던 노무현 정부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논란을 보는 듯하다. 이번 파문이 또다시 국정의 블랙홀이 되면서 내년 대선까지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서둘러 진상 규명에 나서는 것이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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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風前燈火 신세의 대한민국


대통령선거의 해인 내년은 정유년이다. 420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년의 1차 침략에 이어 2차 침략에 나섰다.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정명가도(征明假道·명을 치려 하니 길을 내라)를 내세운 1차 침략은 조선 수군의 승전과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의 창의(倡義)로 실패했다. 이어진 명과 왜적 간 4년이 넘는 강화 협상은 결국 결렬됐다. 이에 조선의 남쪽을 탈취할 목적으로 도요토미가 두 번째 개전을 선언한 것이다.

 정유재란은 왜적이 부산 다대포에 상륙한 1597년 1월 14일부터 1598년 11월 26일까지 이어졌다. 본격적인 전투는 1597년 7월 16일 칠천량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참패한 이후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해전사(海戰史)에 남는 기록적 대승을 거둔 명량해전과 장군이 왜적의 흉탄에 숨을 거둔 노량해전까지의 1년 4개월여다.  

 4년 전 임진왜란 때는 무기력한 관군을 대신해 호남 의병장 고경명과 호서 의병장 조헌 등이 이끈 의병들의 살신성인으로 왜적의 호남 침공을 간신히 막아냈다. 왜적은 정유재란 때는 보복하듯 전라도를 집중 공략했다. 조선 수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한 전라도를 쳐야 조선 수군을 바다 위에 떠다니게 만들 수 있고 조선의 남부 4도까지 탈취할 수 있다는 전략에 따른 것이다. 

 한국외교협회(회장 정태익)와 한국대학총장협회(이사장 이대순)는 13일부터 1박 2일간 정유재란 전적지(戰跡地)를 탐방했다. 정유재란 막바지에 왜적은 울산과 사천에 성을 세웠다. 순천만에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교성을 쌓아 요새화했다. 조명(朝明) 연합 육·해군은 1598년 9월 20일을 기해 육지와 바다에서 3성(城)을 일제히 공격하는 사로병진(四路竝進) 작전을 펼쳤다. 왜교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여서 육지와 광양만 해상에서 양국이 왜적을 협공했다. 

 왜교성 전투는 임진왜란 7년 전쟁 기간 중 동북아 3국이 맞붙은 유일한 국제 전투이다. 7년 전쟁을 마감하는 사실상 최후의 전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전몰(戰歿)한 노량해전만 강조되는 바람에 왜교성 아래 광양만 해상에서 입체적인 작전을 펼친 조명 연합군의 활약상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어제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을 비롯한 전직 대사들과 대학 총장들은 검단산성과 이순신대교, 노량의 충렬사, 남해의 관음포까지 4개 시군, 95km를 달리며 정유재란을 되새기는 강행군을 했다. 전남 순천시 해룡면 출신인 김병연 전 주(駐)노르웨이 대사는 ‘정유재란 역사연구회’(임동규 회장)를 통해 한중일 3국의 격전지를 정유재란 역사공원이나 동북아 평화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공론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재상 율곡 이이는 임란을 예상한 것처럼 생전에 선조에게 두 차례 ‘돌직구 상소’를 했다. 상소에서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라며 조선의 피폐한 재정과 군역의 문란함을 통탄했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려 당파 싸움으로 영일이 없던 선조 때의 조정과 나라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처했는데도 진흙탕 싸움이나 벌이는 작금의 여야 정치권 간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혀를 찰 수밖에 없다.

 고위 외교관과 대학 총장을 역임한 저명인사들은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차까지 흔들리는 작금의 상황을 위기라며 한목소리로 탄식과 우려를 표했다. 지금 대한민국 정부와 정치권의 리더십이 무기력 무능 무책임으로 일관했던 임란 때 조선 조정의 리더십과 다르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는가. 아널드 토인비가 갈파했듯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 밝은 미래는 결코 오지 않는다.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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