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산다고 하더니, 어쩜 정말 그렇게 사니."
평생을 나고 자란 한국 땅에서 20년동안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었던 나는, 어릴 때에도 입버릇처럼 외국에 살 거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도 통화를 하면서 심심찮게 이 얘기를 꺼내시고, 그럴 때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소리 없는 웃음이 묻어 난다.
그 안에는 과년한 딸을 외국에 혼자 보낸 걱정,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아쉬움이나 외로움이 뒤섞여 있다. 실제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야기가 그쪽으로 흐를라 치면 죄송한 마음에 재빨리 다른 화제를 찾아 말을 돌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알면서도 넘어가 주시는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어, 모녀간의 통화는 다른 가족들의 안부나 최근에 있었던 일상 주변을 겉돈다. 엄마와 통화를 마치고 나면 창가에 놓아 둔 의자에 앉아 한참 바깥을 바라본다. 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나 자신을 잊지 않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다. 돌아서면 대부분의 순간은 나, 개인으로 산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어떻게 엄마로 사는 걸까.
파리에 산 지 5년이 된 지금까지도,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도 '난 외국에서 살 거야.'라는 말에 엄마가 '왜?'라는 질문을 하신 적은 없다. 엄마야말로 일생을 한 번, 해외 여행을 가 본 적 없이 '누구누구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한순간도 내려놓지 않으신 분이다. 그런 그녀가 한 번 되물을 것도 없이 내 선택을 존중하고 믿어주는 데에는, 분명 내 엄마의 마음 속에도 '어딘가'를 향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내려놓고 떠나기에 단련되지 않은, 그럴 수 없었던 엄마의 지난 시간은 목적지를 어디로 정해야 할 지를 모른다. 그래서 나는 늘, 엄마에게 자신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일단 비행기만 타면 엄마가 좋아할 것 같은 곳으로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해 놓을게."
엄마는 꽃을 사랑한다.
당신 사진보다도 제철 꽃 사진을 더 자주 보내오시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꽃을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 따스한 빛이 담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속에 등장한 어느 가족의 일상을 보면서도, 들꽃이 만개한 풍경화를 보면서도 그렇다. 그래서 화가 모네의 아뜰리에와 정원이 있는 지베르니는 엄마에게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장소 중의 한 곳이다.
오전께, 맑은 공기를 맡으며 그 정원을 한 바퀴만 천천히 산책하고 나면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리고 이때 담은 기억이 흐릿해질때 즈음, 파리에서 오르세, 오랑주리, 혹은 마르모땅 미술관을 찾아 액자 안에 담긴 화가 모네의 시선으로 그곳을 추억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언젠가 함께 찾을 날을 그리며 기념품 매장을 뒤적일 때, 함께 하신 선생님 한 분이 곁에서 모네의 그림 엽서를 보시며 "어찌 이리 고울까!" 하고 감탄하신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져, 사이 좋게 개양귀비 꽃밭이 프린트된 양산을 골라 하나씩 손에 들고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에트르타. 열 두살때 함께 떠났던 가족여행을 추억한다.
늦여름, 강릉 바닷물은 차가웠고, 그때 찍은 사진들은 고향 집 앨범에서 시간을 붙잡고 있다. 나를 안고 서 있는 아빠의 발목께에 부서졌던 파도가 하얀 빛을 냈고, 문득 그때 맡았던 짠 바닷바람이 다시 불어오는듯 하다.
탁 트인 절벽 언덕, 옥빛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개의 크고 작은 코끼리 바위.
자갈과 파도가 빚어내는 소리는 몇해 전 찾았던 부산 바닷가의 추억도 실어왔다가 자갈을 더 짙게 물들이며 스르륵 사라져가기를 반복한다. 아연한 수평선.문득 '집'에서 멀리 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속세와 얇은 결계를 치고 있는 듯한 수도원, 몽생미셸.
멀리에서 뾰족한 첨탑과 그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내가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결코 접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이야기. 누구보다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이 천 년도 더 전의 이야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한다. 나에게는 먼 이야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열정을 다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이구나. 나도 이 감정을, 이 신비로움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다.
해질 녘, 쿠에농 강가의 석양.
시골에서 자란 나는 노을을 무서워했다. 잘 놀다가도, 하늘이 빨갛게 물들어가면 마음이 불안했다. 곧 있으면 깜깜한 밤이 오고, 어두워지면 산에서 우는 새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가는 게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을이 무서워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를 오빠가 집까지 업어준 날이 있었다. 다섯살 언저리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게 스스로도 놀랍지만, 언젠가부터는 붉은 하늘을 보며 그 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제는 비슷한 하늘을 보면서도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로 자라있다.
이틑날, 호텔에서 아침을 먹으며 또 다시 엄마를 떠올린다. 휴가를 받아 한국에 가면, 처음 며칠은 시차때문에 늘 새벽 3-4시에 일어나 혼자 아침을 먹었다.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굽는 나에게 엄마는 "외국 사람 다됐네."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엄마도 와 보면 아실 거에요. 빵이랑 버터가 너무 맛있어서 멈출 수가 없거든요...
몽생미셸 마을과 수도원 내부.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비밀의 방까지, 이토록 오랜시간 수도원에 있어본 적이 있을까. 컨페런시에 투어의 특별함은 한 번이라도 몽생미셸을 방문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더 와 닿을 것이다.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열쇠로 나무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설 때의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 물기를 머금은 돌 냄새와 얕게 흩어지는 먼지들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다가온다. 어떠한 편견도 없이 공간의 역사와 이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새로움이 있는 오래된 곳, 몽생미셸. 특별함이라는 단어가 더할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도착한 곳은 해적들의 도시, 생 말로.
어제의 바다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도시 곳곳에 걸린 지역색 가득한 깃발들과 바닷가를 따라 길에 만들어진 성벽.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아득한 태양을 잠시 바라본다. 내가 어디에 있건 항상 함께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너무 자주 잊고 있는 당연한 것들에 대한 생각이 뒤를 잇는다.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광장 한 가운데에 자리한 노목으로 눈길이 향한다. 이 나무도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언젠가부터 여기에 있었겠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저서 < 예찬 > 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예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떤 아름다운 음악가, 한 마리 우아한 말, 어떤 장엄한 풍경, 심지어 지옥처럼 웅장한 공포 앞에서 완전히 손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다. 그와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우정은 함께 예찬하는 가운데서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북부에서 중부, 루아르 강을 따라 자리한 고성지대로 가장 오랜 이동을 한다. 지평선이 끝도 없이 이어지며 광활함을 선보이고 해질녘이 되어 호텔에 도착한다. 달리고 또 달리는 버스 안에서 마음 놓고 휴식하며 엄마에게 또 메세지를 보낸다.
'무척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마지막 날이 밝고, 아쉬움과 기대가 동시에 찾아와 심박수를 빠르게 한다. 쉬농소 성에서 왕의 여자, 디안 드 뿌아티에와 카트린 드 메디치를, 클로뤼세 성에서 르네상스를 빛낸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앙부아즈 성에서 프랑수와 1세까지 만나고 나니, 중세부터 르네상스의 프랑스를 관통하는 방대한 양의 이야기가 흘러 넘친다. 일정을 함께한 멤버들끼리는 돈독한 정도 쌓여, 지금 이 사람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겠구나, 하는 확신도 든다.
여기에서 거기를 떠올리는 일.
거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여기를 소개하는 일.
3일동안 프랑스 지방을 훑으며 나눈 수많은 사람들과 긴 세월의 이야기.
그리고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가깝게 닿아있다고 믿는 사람과 꼭 함께 걷고 싶었던 길들.
개선문과 샹젤리제 주변을 들뜬 표정으로 걷는 사람들을 보며 버스에서 내려 다시 파리의 길을 밟았을 때 찾아드는 미묘한 반가움, 그리고 새로움. 이를 감히 카타르시스라는 표현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나 자신으로서, 딸로서, 그리고 가이드로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특별한 2박 3일, 신선한 경험으로 내 안에 묻어 두었던 어떤 것을 버리기도, 먼지를 닦아 꺼내 놓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지베르니에서 산 양산을 비롯해 엄마에게 보낼 소포를 꾸리며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 상자에 담을 수 없는 크기의 마음을, 이곳에 마주 앉아 직접 전할 수 있기를. 그리고 함께 웃으면서 2014년의 시간을 사진에 담아 추억할 수 있기를..
글쓴이 박송이 가이드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던 대학시절, 아시아 배낭여행을 떠났다. 인도 50일간의 배낭여행 이후, 동경했던 프랑스에 도착했고 삶과 사람, 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유로자전거나라 가이드가 되었다. 자유, 평등, 사랑 그리고 똘레랑스의 나라에서 적절한 자기애라는 모토로 자아와 세상을 새롭게 만나는 중이다. 검은 고양이 민식이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만남 중 하나.
제공 : 유로자전거나라 (www.eurobike.kr)
관련여행 : 프랑스 힐링팩 (- > 자세히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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