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 진 ♡/세계여행가이드

청춘을 닮은 열정, 프랑스 몽생미셸 녹턴투어

거울속의 내모습 2015. 6. 3. 23:08

낮 열 두시. 태양이 머리 위에서 강렬한 빛을 내뿜고, 거리를 오가는 이들의 소매는 점점 짧아진다.광장 한 켠에 자리한 카페의 테라스석에는 그늘을 찾아 몰려든 이들의 무리가 활기찬 소음을 만들어내고, 유리잔 부딫히는 소리와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열기를 더한다.

한 여름의 파리는 고온건조한 날씨라, 햇빛만 잘 피해 숨어있으면 끈적하게 땀이 흐르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해부터 폭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뜨거운 날씨가 때때로이 도시를 뒤덮곤 한다.

갑자기 찾아든 더위를 피해 떠나는 한 여름 밤의 짧은 일탈.

숙소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길에 올랐던 인도 배낭여행이 절로 떠오른다. 몇 년 지나지 않았음에도불구하고 열 세네시간씩 닭장같은(!)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한다거나, 3일 밤낮으로 기차와 버스를 오가며 시골 마을로 파고 들던 시절이 아득하게 먼 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짧은 회사 생활로 모은 돈이 얼마 되지 않아 무조건 '싸게' 다녀야만 했으니까.

건강하다는 것, 축복이고 감사한 일이다.

욕심을 내면 내는만큼, 몸이 그것을 감수하고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오랜만의 밤샘 여행. 내 이십대의 마지막 여름을 보다 특별하게 추억하기 위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 노르망디로 향한다.

아름다운 항구 도시, 옹플뢰흐. 백년전쟁때 주요한 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지금은 작고 소박한 매력을 담고 있는 곳이다. 프랑스인들의 인기 여행지로 익히 알려진 곳 답게, 영국해협과 이어진 네모난 항구를 둘러싼 수많은 인파가 인상적이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이내 사람들 머리 사이를 기웃거리며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을 함께 보기 위해 까치발을 들어 보지만 배에 타고 내리는 선원들의작은 움직임만이 있을 뿐이다. 이내 훔쳐보기를 포기하고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앉아있는 사람들이이루어낸 풍경을 바라본다.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연인,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엄마를 조르는 아이, 다른 이들을 흘깃거리며 어디에 시선을 둬야할지 몰라 바쁘게 눈치보는 사람까지. 역시 사람 구경이 가장 재미있다고 여기며 항구 대신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지나가던 할머니가 곁에 있던 할아버지에게 건넨 말에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이 사람들 지금 뭐 하느라 여기 앉아있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항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가 옹플뢰흐 출신의 작곡가, 에릭 사티의 음악을 듣는다. 차분한 피아노 선율과 느릿한 걸음, 이를 따라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평화로운 순간을 빚어낸다. Je te veux. 나는 너를 원해. 한 여인을 향한 그의 순수한 열정이 돌연 진심으로 다가와, 파리의 몽마르뜨르 언덕에 위치한 그의 피아노 연습실 앞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익숙한 낯설음을 간직한 옹플뢰흐를 떠나 한 시간 남짓, 또 다른 프랑스 땅끝에 위치한 에트르타로간다. 유난히 수평선이 곧게 뻗은 이곳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상하리만치 짙은 향수가 밀려온다. 나는 바다가 없는 산 밑의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봄이면 호미를 들고 쑥을 캐러 다녔고 여름에는 산 속의 계곡으로 들어가 돌을 들춰가며 가재를 찾았다. 추수철에는 탈곡기 돌리는 소리를 들으며 메뚜기를 잡았고, 겨울에는 비료포대를 타고 산비탈에서 눈썰매를 탔다. 나의 유년시절 어디에도바다는 없지만, 에트르타의 바다는 나로 하여금 늘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서, 자갈해변을 혼자 걷는 사람을 본다. 무거워보이는 가방을 매고 한쪽 눈을 찡그리며 연신셔터를 눌러대는 움직임이, 향수에 취해있던 내게는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밀려드는 파도는 개의치않는다는 듯, 그렇게 세상의 끝을 등지고 순간을 기록하던 남자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더니 몸을 숙여 자갈 몇 개를 주워들고는 바다에 대고 물수제비 뜨기를 시도한다. 뭐하는거지. 설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저러는 건 아닐텐데. 어떤 생각이 그를 스쳤는지 알 수 없지만, 무모한 그 행동은 내게 새로움을 안겨준다.

'되고 안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고 싶으면 일단 해보는 거다.'

쉽지만 어렵고, 어렵지만 오히려 쉬울 수도 있다. 다만 이 순간의 나는, 삶에 애정을 가지고 무엇이든 '하고자함'에 대해 생각하는 내 자신에 만족한다. 생각에서 멈추더라도 괜찮다. 언젠가, 이 생각의 흐름이 나를 어디든 더 좋은 쪽으로 안내할테니까.

서쪽으로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한낮처럼 뜨거운 태양과 함께, 버스는 몽생미셸을 향해달려간다.


프랑스 국토의 70% 이상은 경작이 가능한 비옥한 농토로 분류된다. 파리를 조금만 벗어나도 드넓게펼쳐진 평야에서 유채나 밀밭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해 부농이 많고, 식량 자급도 역시 높다. 한여름, 첫 번째 밀 수확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기. 수확을 마친 밭에는 클로드 모네의 그림처럼 건초더미가 쌓여 있거나 기계로 만든 동그라미들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보았던 풍경이 두 시간 반 동안 펼쳐지고, 드디어 그곳에 다다른다.


몽생미셸, 미카엘 대천사의 산.

아브랑슈라는 마을의 주교였던 오베르가 꿈 속에 나타난 미카엘 대천사의 명령으로 몽통브라 불리우던 바위산 위에 지었던 수도원은 지금도 성지순례를 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본디 섬 위에 지어진 몽생미셸 주위로는 브르타뉴와 노르망디를 가르는 쿠에농 강이 흐른다. 그러나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도로와 주차장의 콘크리트는 강물이 실어나르는 흙이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었고, 결국 섬이 더 이상 섬이 아니게 될 것이라는 생태환경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강물이 흘러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쿠에농 강 댐 위에서 바라보는 '천공의 성'.


프랑스의 여름은 낮이 길다. 밤 10시가 훌쩍 넘어야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밤 11시는 돼야 완전한밤이 드리운다.2010년, 내게 몽생미셸은 불어오는 칼바람과 겨울 바다의 안개 사이에 자리한 신비로운 분위기에 한동안 넋을 읽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첫인상을 남겼다. 추위도 잊고 그렇게,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적었던 5년 전의 감상과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때로는 부채질도 해 가며 바라보는 2014년의 감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저절로 종교에 대한 경외심이 드는 여기, 몽생미셸.마을을 지나 꼭대기에 자리한 수도원으로 다가가 본다.


몽생미셸 수도원 아래에는 지금도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 상주하는 이들이 많지 않아 조용하고, 저녁 시간이라 더 차분한 분위기다. 진한 에스프레소의 각성 효과가 필요해진 나는, 수도원으로 올라가기 전에 문득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진다. 문을 닫기 직전의 카페나 레스토랑들은 마감이 한창이다. 혹시 바에서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겠냐는 질문에 직원은 선한 웃음을 보이며 흔쾌히 나를맞이한다.

"물론이죠! 들어오세요."

지방 특색이 도드라진 문화권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풍경들도 많이 달라지고, 내가 프랑스의 어디 에 있는지에 따라 만나는 사람들의 성격이나 말투가 확연히 차이를 보인다. 물론 개인차도 있겠지만 다소 깍쟁이 같은 파리 사람들에 비해 지방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좀 더 털털하고 소박한 매력을 지녔 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린넨으로 유리컵을 닦아내던 그는, 천천히 자기의 볼 일을 마무리 하고 나서야 내게 커피잔을 내민다. 안된다고 해도 서운해하지 못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커피를 내어 준 바텐더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곤 커피잔을 감싸쥔다.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스며들고, 밖을 내다보니 이제야 깜깜해지기 시작한다. 여름이지만 수도원 내부는 조금 서늘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에, 황급히 잔을 비운 뒤 옷깃을 여미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Merci!!"

'고마워요. 메아리처럼 똑같은 소리가 내게도 돌아온다.'

수도원까지 걷는 몽생미셸 마을 골목길에서 하나 둘 불이 꺼져가는 상점들과 이미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스친다. 어떤 순간에는 시선이 닿는 골목 전체에 아무도 없어서, 모두가 떠난 마을에 나 혼자 남겨진듯한 때도 있다. 그러나 이내 두런두런 누군가 이야기 나누는 소리, 타박타박 돌길을 밟고 걷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낯선 공간에서 나 홀로 찰나의 정적을 마주할 때의 짜릿함.

'이러한 순간의 인상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 장소에 대한 기억들이 완성된다. '

거대한 수도원의 입구를 지나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각각의 방들은 그 역할에 어울리는 조명과장식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낮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감상에 젖기에 충분하다. 수도원이라는공간에 더할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십자가와 공기의 움직임에 맞추어 섬세하게 흔들리는 촛불. 작은기도실이 빚어내는 신비로움에 선뜻 발을 떼기가 어렵다.


남쪽 테라스에 서서 저 멀리, 인간이 밝혀놓은 반짝임을 바라본다. 수도원에서 내려다본 '속세'. 세상으로 뻗어난 굽은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진다. 어느덧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을 스쳐 어딘가로 향하는 갈매기들의 움직임이 가볍다.


여름의 몽생미셸은 밤 시간동안 수도원 내부 곳곳에서 음악회를 선보인다. 하프, 첼로, 클라리넷..둥근 천장을 타고 예배당에 울려퍼지는 선율은 분명 특별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 음표를 따라 사색하는 사람들, 진중한 표정으로 연주에 집중하는 음악가. 열대야에 뒤척이다가 선잠이들었을 때 설핏 꾸는 얕은 꿈 같은 순간이다.

수도원은 그 구성 자체도 큰 흐름을 지니고 있다. 가장 아래층에는 몸의 양식인 식량 보관소, 그 바로 위층에는 마음의 양식인 책을 만드는 필사본실, 가장 꼭대기에는 정신과 영혼의 양식을 쌓는 사색공간으로 쓰이는 중정.중정은 몽생미셸에서 가장 멋진 공간이다. 보폭에 맞춰 세워진 기둥들을 따라 네모난 정원을 따라 걸으며 중세 수도사의 삶을 떠올려본다. 한 걸음, 두 걸음... 검은 바다를 향한 유리 너머로 비치는 모습은 마치 공중 정원같다. 바깥 세계와 분리된 듯 하면서도 이어진,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공간. 차분히 오늘 하루를 정돈하고 가까운 내일과 먼 내일의 일까지 그려본다.


'새벽 한 시, 다시 파리로..'

시골의 국도를 달리며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라 도망치는 토끼를 뒤로하고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단조로운 길, 창 밖은 깜깜하기만 하고 은은한 달빛만 정면 창으로 새어든다. 기사가 틀어놓은라디오에서는 오래된 샹송이 흘러나와 이 밤의 정취가 더욱 물씬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 절망 > 에서 '일기는 가장 저급한 형태의 글쓰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요성을 띄는 것은 그것이 '밤'에쓰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나 역시 밤이 지니는 감성의 효용성을 믿는다. 특히나 '여름 밤'은 더 그러하다. 잠과 현실의 경계 어디쯤에서 방황하던 한국의 열대야. 나인듯 내가 아닌 나와 조우할 수 있는 무섭도록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 구름 낀 달이 뜬 밤이라면 더더욱 깊게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6시'

샹젤리제 끝에서 밝아오는 옅은 분홍색 하늘을 바라보며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얼마 후면 다시 머리 위로 자리를 옮겨 세상을 환하게 밝힐, 때로운 너무 뜨거워 괴롭기도 한, 우리의 청춘을 닮은 태양을 마주하는 길고도 짧은 무박2일이었다. 드문드문 앉아 이른 시간에 지하철에 탄 승객들을 바라보며 혹시 나의 어제는 꿈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이토록 뜨거운 여름을닮아 비현실적이지만, 어제는 분명 존재한다. 그 시간의 더미들이 쌓여 나라는 인간을이루어냈으니..여독으로 피로할 법도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다.

어제를 닮았지만 분명 새로운, '오늘'이 이미 시작됐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글/박송이, 사진/박송이, 임현승, 한주영

글쓴이 박송이 가이드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던 대학시절, 아시아 배낭여행을 떠났다. 인도 50일간의 배낭여행 이후, 동경했던 프랑스에 도착했고 삶과 사람, 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유로자전거나라 가이드가 되었다. 자유, 평등, 사랑 그리고 똘레랑스의 나라에서 적절한 자기애라는 모토로 자아와 세상을 새롭게 만나는 중이다. 검은 고양이 민식이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만남 중 하나.

제공 : 유로자전거나라 (www.eurobike.kr)

관련여행 : 몽생미셸 녹턴투어 (- > 자세히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