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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산행] 몽골군을 물리친 신화의 현장, 죽주산성

거울속의 내모습 2016. 8. 12. 21:14

[산성산행] 몽골군을 물리친 신화의 현장, 죽주산성

죽주산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동문. 정면에서는 아치형의 홍예문을 이루나 안쪽에서 보면 사각으로 되어 있고, 아래 쪽 주차장과의 거리는 불과 130m 정도다.
세계 최강 몽골군의 연속된 침략

인류 역사상 가장 광대한 나라를 세웠던 민족, 몽골족. 몽골은 서기 1200년대 초부터 아시아와 유럽을 포괄하는 드넓은 면적을 영토로 삼아 나라를 열었다. 그 주인공은 테무친(鐵木眞), 곧 칭기즈칸이다. 그는 문맹이었으나 총명하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부터 삶의 고비를 넘나드는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강철 같은 심신의 단련을 이루었다. 무자비함과 잔혹함 교활함과 일관성을 자산으로 삼아서, 그것으로 거대한 제국을 실현하였다. 주변 이민족들의 영토를 유린하면서 그가 열어간 나라, 원(元)의 역사는 국가 규모를 초월한 세계사급 역사였다.

몽골이 본격적으로 고려에 침입해 온 것은 고려 고종 18년인 1231년 8월. 이때가 제1차 침입이었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몽골은 이후 크게 6차례, 침입한 횟수로는 모두 11번에 이르렀다. 당시 고려에서는 최충헌 집안에 의한 무신정권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몽고의 3차 고려 침입 당시 이 죽주산성을 지켜낸 송문주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인 충의사. 동문에서 1시 방향에 있다.
사실 몽골은 이전에도 산발적으로 고려에 침입해 왔었다. 1219년 고려 영토 안으로 밀려온 거란족을 치기 위해서 몽골군이 고려 국경을 넘어 들어온 일이 있었다. 이 시작단계에서 고려와 몽골은 함께 거란을 협공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이루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후 몽골이 고려에 대한 공격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죽주산성의 배후인 비봉산 방향을 바라보며 길게 이어지는 죽주산성의 남쪽 성곽면.
고려에 대한 몽골의 1차 침략은 장수 살리타이(撒禮塔)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와 개경까지 밀고 들어온 일이었다. 그때 황주 동선역(洞仙驛)에서 양국의 군사들이 대대적인 접전을 벌였고, 귀주성(龜州城)에서는 박서(朴犀) 장군의 지휘 아래 고려군의 선전이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몽골의 2차 침입은 그 이듬해에 있었다. 1차 침략에 이어 적장 살리타이는 1232년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여에 걸쳐서 개성 이남 경기도 남부 일대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때 이 남하를 저지시키는 위대한 승전이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과 용인의 처인성에서 있었다. 오늘날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위치한 처인성은 그 규모가 매우 협소한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을 지키던 의승장 김윤후(金允候)가 적장 살리타이를 활로 사살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안성 죽주산성에서 방호별감 송문주(宋文冑) 장군의 지휘 아래 고려군이 위대한 승전을 거둔 것은 1233년 몽골의 3차 침입 때였다. 송문주 장군은 이순신 장군이나 김유신 장군같이 유명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제대로 된 우리 국난극복사가 만들어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평가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북치성 포루 안에서 전방을 바라본 풍경. 너른 안성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기가 용이하다.


그는 일단 몽골의 1차 침입 때 귀주성을 지켜낸 박서 장군 휘하의 부장이었다. 그렇게 복무하는 가운데 그는 몽골군을 상대하는 효과적인 전술전기를 익힐 수 있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죽주산성 승리의 신화는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박서 송문주 장군 사이에는 이것 말고도 또 다른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바로 고향이 같은 죽주였다. 즉, 이 둘은 고향이 같은 선후배 사이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인연 위에서 귀주성 전투에서의 승리에 기여했던 송문주 장군은, 고향 죽주산성의 방어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몽골의 3차 침입을 맞아서 죽주산성 방어를 승리로 이끈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몽골군이 동원하는 새로운 공성기술이 나오면 그것이 무력화시키는 계책이 바로 송문주 장군의 두뇌에서 나왔다. 전투가 보름여 동안 진행되니 몽골군은 점차 피로도가 높아졌다. 그 틈을 노려 고려군이 성 밖으로 나와 기습하니, 몽골군은 고려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큰 석재를 3단으로 쌓아올린 북치성 포루의 정면 맨 아랫단에는 총안으로 보이는 3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총안은 양 측면에도 하나씩 더 있어서 모두 다섯이다.

안성의 지역적 정체성

예로부터 안성은 전국의 물화가 모여드는 유통의 중심이었다. 사방에서 오가는 물화들은 여기를 목적지로 하거나 최소 경유해 나갔다. 전국의 돈과 물건이 한 장소로 몰려들었으니, 여기서는 원하는 모든 것을 맘에 쏙 들게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안성맞춤’인 것이다.

죽주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죽주는 삼국시대에는 개차산군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고려 때 죽주로 바뀌었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죽산이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에 안성에 통합되면서 죽산면으로 격이 낮추어졌다.

      중성의 남서 방향 극점, 즉 외성의 동남단에 위치한 서문.


죽주산성이 있는 지역은 안성시 전체로는 동북단이다. 경계를 맞대고 이웃하는 곳으로 서쪽에는 오산 ․ 평택이 있고, 오른쪽에 충북 충주 ․ 장호원 ․ 음성이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용인과 이천이, 다시 아래 남쪽에는 진천이 있다.

죽주산성의 지리 공간적 위치는 죽산면 죽산리와 매산리에 걸쳐 있는데, 남쪽으로 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372m 높이의 비봉산이 자리하고 있다. 죽주산성은 이 비봉산 동쪽으로 이어진 250m 높이의 죽주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죽주산 정상부를 이어서 감싸고 있는 테뫼식(산 정상에 산성을 축조한 형태) 산성이 바로 죽주산성인 것이다. 죽주산 정상부에서 서쪽을 올려다보면, 비봉산은 말없이 울울창창하다. 그러나 죽주산의 북-동-남쪽 3면은 멀리까지도 조망되는 너른 평야지대다.

       죽주산성의 남서쪽으로 보이는 배후 비봉산.

죽주산성 둘러보기

죽주산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중첩된 3중성이라는 특이한 구조다. 죽주산성이 언제 만들어 졌고, 어떤 보수와 확장을 통해서 오늘의 모습으로 남았느냐 하는 질문들에는 아직 분명한 답이 없다. 산성 안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굴된 적이 있지만, 그것으로 축성시기를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이런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뒷받침되는 축성시기의 추정이 삼국시대까지는 무리가 없다고 한다. 아울러 문헌적인 확인도 고려시대에는 확실하다. 이러한 여러 조사 결과로 가지고 내린 잠정적 결론은, 내성은 삼국시대에, 중성은 고려시대에, 그리고 외성은 조선시대에 각각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7번 지방도를 빠져나와서 다소 복잡한 연결을 통해 죽주산성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주차장에는 죽주산성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몇 개 서있고, 오르막 방향으로 산성을 향해 오르는 진입로가 뚜렷하게 보인다.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면 금방 아치형 성문이 보이는데, 누각이 없어 조금은 부족하게 느껴진다. 죽주산성의 정문 격인 동문이다.

죽주산성의 서문과 남문 사이 크게 꺾이는 지점에 위치한 남치성의 축대는 다시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문 좌우로 이어가는 성벽은 아주 뚜렷하다. 숲에 가리면서 높이가 갑자기 올라가는 남문 방향 연결보다, 오른쪽 북문 방향으로의 성곽이 단연 분명하게 보인다. 보수를 거친 것이기는 하지만, 원형을 최대한 살린 튼튼한 성벽이 방어시설로서의 견고함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동문에 들어서면 전방으로 축구장 두어 개 넓이의 개활지가 보인다. 동문 주변을 최저부를 삼아 중앙은 평탄하고, 세 방향으로 점차 높아지는 분지형이다. 이 분지에는 과거 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막사, 병기고, 창고, 취사시설, 수원지 등이 자리했을 것이다. 공지의 오른쪽을 따라 내부로 길이 이어지는데, 그 축대가 아마도 내성 성벽이 아닐까 싶다. 내성벽을 전체로 이어보면 속칭 고무래 정(丁)자를 뒤집은 모양으로 윤곽이 형성된다. 그런데 그 내성이 원래 오늘날 참호 개념으로 최초에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중성이 먼저 만들어진 다음에 중성 안에다 옥쇄를 각오하는 최후 저항선으로 추가하여 쌓게 된 것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이어서 2시 방향으로 낡은 건물 하나가 보이고, 다시 1시 방향에는 기와를 얹은 사당이 하나 보인다. 전자는 성 안에 있다가 수년 전 성 밖으로 이사 나간 절 자리이고, 후자는 송문주 장군을 기리는 사당 충의사(忠義祠)다. 충의사를 대충 둘러보고, 다시 동문 오른쪽으로 휘어져 올라가는 성벽을 따라 오른다. 동문에서 북문 방향으로 뻗어간다. 그런데 사실 이 구간은 아주 일찍부터 보수작업이 이루어졌던 구간이다. 보수가 제대로 되어서인지 원래 성벽과의 조화가 자연스럽다.

성벽을 따라 얼마쯤 오르니, 이번에는 주변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지대가 나타난다. 북치성 자리다. 북치성 위에는 원형을 대체적으로 보전하고 있는 포루가 자리 잡고 있다. 포루 주변에서 전방을 보면 삼면이 두루 눈에 들어온다. 아주 드넓은 평야지대인데, 들판을 지나 먼 산까지의 거리가 20Km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남아 있는 남문의 모습. 문짝을 고정하는 장치인 지도리가 양 쪽으로 보인다.
포루는 벽돌처럼 자른 큰 직육면체의 돌을, 들판을 바라보며 디귿 자 형태로 쌓은 구조물이다. 세 방향의 벽에는 각각 구멍이 나있는데, 전방으로 3개, 양 측방에 하나씩 모두 5개의 총안을 달고 있다.

포루 앞 성벽 밑에는 안내 표지판이 있어서 성벽의 흐름을 표시해주고 있다. 하나는 능선을 타고 서쪽으로 급하게 돌아나가는 내성벽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포루 아래 회절부에서 낮은 쪽으로 내려가는 무너진 외성벽을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내성벽은 온전하고, 외성벽은 무너져 내렸다. 그러니 답성은 내성벽을 따라 남쪽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내성벽 밖으로 중성벽의 자취도 있는데, 이 중성벽 또한 무너져 숲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결국 여기서의 진행은 내성벽을 따라가야 한다. 내성벽은 지세에 따라 중간에서 한 번 거의 직각으로 꺾인 다음, 다시 얼마 후에 죽주산 정상부를 향해 재차 꺾여서 치고 올라간다. 외성벽이 시작되는 지점인 죽주산 정상부의 서쪽에는, 죽주산성 전체로 서문이 비탈진 골짜기를 향해서 입을 벌리고 있다.

죽주산 정상부 주변은 중성벽과 내성벽이 하나로 겹쳐지는 시작점이다. 여기서 시작되는 내성과 중성이 겹쳐진 성벽(하나의 성벽이 두 성벽의 역할을 함께 한다는 의미)은 바깥쪽 골짜기를 내려다보면서 남치성까지 뻗어간다.

남치성에 이른 성벽은 다시 중성벽 만으로 분리되며 크게 동문방향으로 꺾인다. 그런 다음 바로 남문을 만든다. 이제 남문에서 치성부를 지나 출발지 동문에 이르면, 성벽을 따라 연결하는 답사는 마무리가 된다.

information - 교통

수도권에서 죽주산성으로 가는 교통축은 중부고속도로다. 중부고속도로 일죽IC에서 죽주산성까지의 거리는 주행거리로 3,5km. 영동고속도로는 호법JC를 통해서 중부고속도로와 연결되고, 경부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는 각각 신갈IC와 안산JC를 통해서 영동고속도로와 연결된다. 죽주산성 부근에서는 17번 지방도와 38번 지방도를 이용해서 접근한다. 특히 17번 도로는 죽주산성휴게소를 통해서 죽주산성과 직접 연결되는 도로로 이를 이용하면 수월하다.


이수인 객원기자 / emountain@emount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