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 진 ♡/국내여행가이드

여백 가득 채운 따뜻한 울림.. 경주 폐사지를 찾아서

거울속의 내모습 2016. 7. 19. 22:56



80m가 넘는 탑이 올라섰던 경주 황룡사 목탑지에 거대한 탑을 떠받쳤던 주춧돌만 남아 옛 영화를 기억하고 있다. 경주=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

탑과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은 그곳에 서면 마음이 편해지고 따뜻해졌다. 비어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허허로워서 더 많은 울림을 전해주는 폐사지 이야기다. 황량하게만 보일 법한 그 풍경이 되레 지친 심신에 위로를 전해주는 곳. 묵묵히 지켜온 천년의 세월, 폐사지는 그 시간을 품은 온기로 언제나 따사롭다.

초록에 이어 단풍까지 빛을 잃어가는 늦가을, 경주의 폐사지를 둘러봤다. 처음 찾은 곳은 사천왕사지다.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狼山) 자락에 있는 절터다. 이곳에서 출토된 녹유사천왕상은 신라 예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울산-경주를 잇는 국도변이라 다른 폐사지에 비해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다. 이곳엔 탑도 없다. 절집을 올렸던 주춧돌과 비석을 떠받치던 귀부, 소박한 당간지주만 남아있다.

사천왕사지의 목이 잘린 귀부. 길쭉하고 가지런한 앞발 발가락이 인상적이다.

사천왕사지.

허름해 보이지만 신라의 호국사찰이었던 사천왕사지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신라는삼국을 통일했지만 바람 앞 등불마냥 불안하기만 했다. 통일신라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당의 야욕 때문이었다. 몽고 침입 때 고려가 팔만대장경을 새기며 불력에 의지했던 것처럼, 신라는 사천왕사를 지어 당의 침략을 물리치려 했다.

당의 50만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라 조정은 용궁에서 비법을 배워왔다는 명랑법사에게 해법을 구했고, 법사의 지시대로 낭산 자락에 사천왕사를 짓기 시작했다. 절이 지어지는 도중 당의 군사가 서해를 넘어온다는 소식에 명랑법사는 천으로 벽을 두르고 띠풀로 신상을 엮어 세운 뒤 유가승 12명을 거느리고 ‘문두루비법’을 행했다. 일종의 밀교였던 그 비법이 통했는지 두 번에 걸친 당나라의 공격은 군사를 실은 배가 모두 풍랑에 침몰하면서 실패했다.

당 고종은 그 연유를 알고자 당시 옥에 가두었던 신라 유학자 박문준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박문준은 고향을 떠난 지 오래돼 배가 왜 침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라가 당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사찰을 짓고 법회를 열고 있다고 답했다고. 이에 당 고종은 악붕귀를 사신으로 보내 확인시켰다. 신라는 사천왕사를 들키면 안되겠기에 바로 인근에 새로 망덕사란 절을 지어 악붕귀를 안내했다. 하지만 당의 사신이 사천왕사가 아님을 눈치 채고 들어가지 않으려 하자 신라는 금 천냥을 뇌물로 그를 회유했다. 악붕귀는 당으로 돌아가 박문준이 말한 대로라고 아뢰었고, 흡족한 당 고종은 그제서야 신라를 칠 마음을 접었다고 한다.

사천왕사지의 금당 터를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 정사각형 모양의 건물 터엔 똑같이 12개의 초석이 박혀있다. 돌들의 가운데엔 기둥이 박혀있던 동그란 홈이 있다. 신라문화원의 박주연 해설사는 “이곳이 문두루비법을 행할 때 신상을 세웠던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말했다.

사천왕사지에서 고개를 들어 도로 건너편 보이는 작은 숲이 망덕사지다. 악붕기에게 보여주기 위해 지었다는 바로 그 사찰의 터다.

사천왕사가 자리한 낭산 자락은 신유림(神遊林)이 있었던 곳이다.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신라의 토착신이 노니던 곳이라며 신성시했던 숲이다.

이 신성시되는 낭산 자락에 있는 또 하나의 절터가 황복사지다. 경주의 절 이름에 ‘황’자가 들어가면 왕과 관련이 있다는 뜻. 선덕여왕의 분황사, 진흥왕의 황룡사처럼 황복사는 신문왕과 그 연을 닿고 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마을 길 바로 옆 논밭 사이에 삼층석탑 하나 외로이 서있는 곳이 황복사지다. 처음엔 조금 초라해 보이지만 탑 뒤로 펼쳐진 보문들녘의 풍경을 바라보면 마음이 달라진다. 차고 넘칠 정도로 넉넉한 풍광을 품고 있는 폐사지다.

1943년 이 삼층석탑을 해체 보수할 때 순금으로 만든 여래좌상과 입상, 금동사리함이 나왔다. 그 금동사리함에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웠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석탑 주변 밭둑엔 귀부 2개가 있다. 절반 가량 땅에 파묻힌 이 귀부는 등에 ‘왕(王)’자가 새겨진 게 특징이다. 북쪽 밭둑에는 주변에 돌아다니던 12지신상을 모아 파묻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폐사지는 신라의 가장 큰 절이었던 황룡사지다. 분황사 옆 넓은 들판이 바로 그곳이다.

황룡사지 금당 터에 앉아 거대한 탑이 솟았을 목탑지를 바라본다.

천년의 세월이 품은 온기를 전해주는 황룡사 목탑지.

황룡사지에 도착했을 때 박주연 해설사의 얼굴은 발그레 상기됐다. 그는 이곳에 오면 그냥 좋다고 했다. 주변에 아무 것도 없어 마음이 편하다고. 다른 폐사지는 을씨년스러운 게 있는데 유독 이곳만은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그는 황룡사지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곳이라고 했다.

황룡사지의 중심은 80m 높이의 9층 목탑이 있던 자리다. 기단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바위 덩어리가 탑의 심초석이다. 그 주변에 64개의 초석이 가지런히 박혀있다.

목탑지 바로 옆은 황룡사 금당이 있던 자리. 솔거가 벽에 그린 소나무에 새가 날아와 앉으려다 부딪쳐 죽었다는 그 건물이다. 장육존상이 서있던 금당은 불상을 떠받치던 대좌들만 남아 옛 영화를 기억하고 있다.

금당의 주춧돌에 걸터앉아 목탑지를 건너다본다. 지금은 빈 저 공간위로 우람하게 솟구쳤을 9층목탑을 떠올려본다. 폐허에 꽉 들어찬 그 허허로움을 그려본다.

경주=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mailto:sungwo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