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 진 ♡/국내여행가이드

남해 바래길⑨ 그대 떠나는 길이 아쉽지 않게..

거울속의 내모습 2016. 7. 11. 21:45


‘지리적표시제 13호(임산물)’로 인증 받은 남해군 창선면의 고사리는 국내 고사리 생산량의 약 40%에 달하는 대표적 효자 작물이다. 품질과 맛이 좋아 타 지역보다 가격도 후한 터라 이 일대에서 고사리로 거둬들이는 연간 수익이 70여억 원에 달할 정도란다. 그 덕에 고성, 사천(삼천포), 사량도 등을 바라보며 걷는 이번 구간의 이름도 ‘고사리밭길’. 촉감 좋은 흙길과 시원한 조망, 다소 이국적 풍경이 걷는 이들을 단숨에 휘어잡는 코스다.

남해 바래길 코스의 마지막 일정이 된 고사리밭길. 초록의 둥근 언덕과 그 너머로 보이는 사천(삼천포), 고성 일대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곳이다. ⓒ황소영 객원기자
지난 12월호부터 연재를 시작한 남해 바래길이 어느덧 마지막 코스에 다다랐다. 총 14구간 중 계획구간(미개통)을 제하곤 아홉 구간이다. 1구간(다랭이지겟길), 2구간(앵강다숲길), 3구간(구운몽길), 4구간(섬노래길), 5구간(화전별곡길), 6구간(말발굽길), 13구간(이순신호국길), 14구간(망운산노을길)…. 그리고 오늘 걷게 될 7구간(고사리밭길)까지.

어느 한 곳 수려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인위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남해의 조그만 다랭이논들과 비취색 바다, 고운 모래밭, 숲이 우거진 언덕과 겨울바람을 맞고 자란 시금치와 고구마와 마늘, 깊은 물속에서 막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들. 심지어 휘황찬란한 펜션 건물들까지,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 말이다. 나머지 다섯 구간이 모두 열렸을 때, 드디어 바래의 모든 길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 남해는 또 어떠한 모습으로 걷는 이를 맞을는지….

고사리밭? 고사리밭!

1구간부터 순차적으로 걸어오다 고사리 수확시기(3월~6월)와 맞물린 7구간을 제하고 13~14구간을 먼저 걸었다. 이제 어린 고사리는 모두 꺾이고 삶고 말려졌다. 길 위엔 미처 꺾지 못하고 남은 고사리들이 키를 훌쩍 높이고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구간 시작점은 적량해비치마을. 섬 안의 섬 창선면 동쪽 언저리에 위치한 적량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침입로를 차단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지난 봄, 적량에 온 적이 있다. 지족마을을 출발해 창선교를 건너 추섬공원의 꽃길과 보현사 임도를 지나…. 적량은 6구간의 종점이자 7구간의 시작점이다. 빨간 등대 하나와 고깃배 몇 척이 파도에 흔들렸던 포구마을. 2010년 방영한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의 촬영장소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봄에는 마을 곳곳 볕이 들고 바람이 드는 곳마다 삶아 널어둔 고사리가 그득그득하였다. 채반으로는 어림도 없다. 모기장처럼 생긴 검은 천 위에 끝도 없이 누웠던 남해의 고사리들. 그 고사리들은 지금쯤 조물조물 맛나게 무쳐져 뭍에 사는 뉘집 저녁밥상 또는 제사상 위에 올라가 있겠지.

이번 구간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쉼터. 벤치가 있어 쉬어가기 좋다. 정면에 사천 와룡산이 보인다. ⓒ황소영 객원기자
적량을 출발한지 40분, 벤치 두어 개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벤치가 있다 하여 막연히 앉아 쉴 수만은 없는 곳이다. 눈앞에 처음으로 고사리밭의 위용이 펼쳐졌으니까. 차밭 같기도 하고, 목장 같기도 하고, 골프장 같기도 하다. 둥글게 모여 앉은 언덕들이 잔디밭처럼 깡총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들도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 찍기 바쁘다. 고사리밭 너머 바다가 있고, 그 너머엔 사천이 있다. 섬과 섬을 잇는 창선․삼천포대교와 기다랗게 누운 와룡산도 보인다. 지리산에서 남으로 보는 와룡산과 남해에서 북으로 솟은 와룡산의 모습은 같은 듯 다르다. 그리고 그 사이 넓고 광활한 고사리밭. 상상 이상, 이제 시작에 불과한 풍경이 되겠다.

바래길 옆에 사는 문경호 목사가 블루베리를 따왔다. 지난달까진 초록 일색이었던 열매가 한 달 만에 보라색으로 물이 올랐다. 달콤한 열매를 먹는다. 연둣빛 고사리 언덕과 푸른 바다와 딴 세상인 듯 아파트 단지가 높이 솟은 사천의 도시 그림자를 바라보며 우걱우걱, 그 귀한 블루베리 열매를 한손 가득 쥐고 입안에 털어 넣는다.

산중이든 도로변이든 가는 곳곳 들어선 고사리밭과 바다 왼쪽으로 보이는 창선, 삼천포대교. ⓒ황소영 객원기자
바래길(14구간) 곁에 사는 문경호 목사가 직접 재배한 블루베리를 챙겨왔다. ⓒ황소영 객원기자
고사리밭엔 뱀이 산다

고사리밭 사잇길을 저벅저벅 걷고 있는데 무언가 딱, 정강이에 부딪힌다. 조그만 청개구리다. 으아아악!!! 평상시 둔한 몸도 이럴 땐 예외다. 순식간에 앞서 걷는 이태용씨의 팔뚝에 매달려 호들갑이다. 이 밭에서 저 밭으로 넘어가는 개구리 몇 마리가 더 보인다. 놀라서 팔짝대는 통에 혹여 등산화에 밟힌 건 아닌지 걱정이 될 만큼.

'개구리가 많다는 건 뱀도 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뱀이 특별히 고사리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고사리밭의 우거진 환경을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고사리밭엔 뱀이 많다는 걸. 고사리를 뜯기 위해선 몸을 낮춰야 하고, 그 때문에 얼굴 가까이 뱀을 만나는 일도 부지기수다. 고사리를 딸 땐 목이 긴 장화가 좋다. 대범한 할머니들은 장화로 툭툭, 뱀을 차버리기도 한다.

뱀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고사리밭으로 발을 들이미는 게 내키지 않는다. 몸은 좌로 휘었지만 발은 끝까지 밭 안에 들여놓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사진을 찍는다. 구간 후반부 식포마을의 ‘하늘하늘언덕’에선 비늘 선명한 뱀의 허물을 보고 말았다. 그러니 절대, 설령 고사리 수확기가 끝났고, 지키는 이가 없다손 치더라도 함부로 덥석 고사리밭 안에 들어가선 아니 될 것이다.

전망이 트인 곳마다 사진 찍기 바쁘다. ⓒ황소영 객원기자
고사리밭에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남해의 고사리밭은 유독 더 가파르다. 바래길은 비탈진 고사리밭 사이에 있고, 길의 위쪽과 아래쪽은 극명한 각도차를 보인다. 위쪽의 고사리는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고, 아래쪽의 고사리는 푸른 바다와 맞물렸다. 자칫 저 아래 포구까지 떼굴떼굴 굴러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노령의 주민들이 이렇게 가파른 길을 오르내린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루 종일 고사리를 따고나면 늦은 밤 이불을 펴고 누운 방안 천장에서도 고사리가 어른댄다. 따스한 햇살과 청정한 해풍을 맞고 자란 남해의 고사리엔 굽은 등으로 꺾고 삶고 말리는 남해민들의 수고와 정성도 배어 있다. 그래서 더 눈물 나게 맛나다. 곳곳에 걸린 ‘농작물 채취 금지’ 표지판을 허투로 봐선 안 된다.

우측으로 길이 꺾인다. '영화에 나왔던 곳입니다.' 문목사의 말이다. '정말요?' '아니, 이제 곧 나올 거라는 얘기죠.'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다. 아직 영화나 TV 매체에 제대로 소개된 적은 없지만 충분히 나올 법한 곳. 길을 돌아서자 '와!' 짧은 탄성이 쏟아진다. 문목사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시야를 가렸던 비탈이 사라지면서 풍경은 다시 한 번 장관을 이루었다. 드넓은 고사리 평원 너머로 남해와 사천의 바다가 펼쳐졌다. 고사리밭길의 풍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가는 곳곳 외지인은 낯선 풍경에 놀라고, 현지인은 익숙한 풍경에 으쓱해한다.

식포마을 인근의 ‘하늘하늘언덕’. 눈앞의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바람 시원한 언덕이다. ⓒ황소영 객원기자
밭에서 자라는 노다지

길 우측으로 가인리 세심사가 보인다. 세심사를 돌아가면 1억년 전 거대 파충류가 거닐었던 공룡발자국 화석지가 나온다. 1998년 마을 대학생에 의해 처음 발견됐으니 세상에 존재를 알린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약 36개의 발자국 중엔 사람 발자국과 비슷한 것도 있단다. 과학적 이론에 따르면 중생대는 인류 출현 전이다. 사람 발자국과 비슷할 뿐이지 그게 꼭 사람의 것은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1억년 전의 지구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라인하르트가 쓴 책 <미스터리 박물관>엔 이런 문구가 나온다. '대다수의 인류학자는 (중략) 인간의 흔적이 보이는 화석은 ‘날조’된 것이거나 ‘자연현상을 잘못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사람들은 본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다른 사람의 충고를 달가워하지 않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사람 발자국 모양의 화석은 형태가 비슷한 공룡의 것일 수도 있고, 1억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것일 수도 있다. 인류 출현 전이니 사람일 리가 없다, 라는 단정보단 어쩌면 정말 그때도 공룡과 더불어 살던 사람이 있었을지 모른다, 라고 생각하는 게 더 흥미롭다.

가인리에서 올라서는 길. 가인에서 식포마을 사이에는 고두와 언포마을로 향하는 갈림길이 있지만 어디로 가든 이 지점에서 만난다. ⓒ황소영 객원기자
고사리밭 언덕의 그림 같은 집을 코앞에 두고 길이 나뉜다. 고두와 언포마을을 거치는 길과 곧장 고사리밭으로 들어서는 길인데, 중간에 만나므로 어디로 가든 상관은 없다. 도로를 버리고 언덕길로 올라선다. 하늘은 흐려졌지만 잿빛의 고사리밭도 나쁘진 않다. 비오는 날도 좋단다. 마치 산중 깊은 곳에서 바라보는 골안개처럼 고사리 언덕 사이사이로 피어나는 안개가 제법 운치 있다는 것. 맑은 날은 맑은 대로 흐린 날은 또 흐린 대로 좋다. 남해의 고사리는 몸에만 좋은 것이 아니다. 폭신한 흙이라서 걷기에 좋고, 뛰어난 풍경 덕에 눈에도 좋고, 마음에도 좋다. 고사리가 어떠한 환경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자라는지 알았다 해도 이런 광경 앞에선 저절로 감탄이 쏟아진다. 고사리밭길에선 사진을 찍고 찍히는 반복된 패턴이 끊이질 않는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고사리 농사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고두마을 박주용씨다. 정작 단감 과수원은 소득이 없고, 오히려 감나무 아래 고사리들만 무럭무럭 자랐다고 한다. 바람에 날아간 포자는 인근 언포, 식포마을까지 퍼져나갔다.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자랐고, 이제는 적량면 동부 일대의 ‘노다지’가 되었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남해의 고사리는 우리나라 전체 수확량의 절반 가까이 되었다.

고사리밭을 벗어나면 다시 도로가 나오고, 식포마을을 지나 동대만휴게소까지 가 닿으면서 끝을 맺는다. 바래길은 이렇게 끝나지만 (아시다시피) 남해의 아름다움에 마지막이란 없다. 다시 와야 할 이유를 수없이 남겨둔 채 이제 막 익숙해진 섬을 돌아나선다.

INFORMATION | 남해 바래길_ 제7구간 고사리밭길 구간 정보

제7구간(고사리밭길) 구간별 거리

적량해비치마을~천포(4.4km)~가인(1.3km)~(고두~언포)~식포(4.3km)~동대만휴게소(4.3km)

거리:약 14.3km

시간:휴식 포함 약 4시간 30분

순서대로라면 6코스(말발굽길)에 이어 걸어야 맞지만 고사리 수확 시기를 피해 일정을 늦춘 구간이다. 시작점은 6코스 마지막 지점인 적량해비치마을. 이후 천포~가인~식포마을 등을 거쳐 동대만휴게소까지 이어진 14.3km의 길로 큰 오르내림 없이 편하게 걸을 수 있다. 수확을 끝낸 고사리는 초가을까지 1m 이상 자라는 등 남해에서만 볼 수 있는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초봄이나 겨울의 고사리밭은 갈색). 가인에서 식포로 가는 길에 고두와 언포를 거치는 갈림길이 있는데, 어디로 가든 만나므로 크게 헷갈려 할 필요는 없다. 식포마을을 거쳐 동대만휴게소까지 약 4km는 방조제를 포함해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야 하므로 안전에 유의한다. 이번 구간은 9개월간 이어진 남해 바래길의 마지막 코스가 된 곳이다. 안내도엔 제8구간(동대만진지리길)도 포함돼 있지만 계획구간으로 표기 된데다 대부분 아스팔트 찻길이어서 이번 걷기여행에선 제외했다.

오가는 길 (지역번호 055)

대중교통:서울 서초동남부터미널에 남해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아침 7시 첫차부터 저녁 7시 30분까지 하루 11회 운행하며, 요금은 23,700원. 4시간 30분쯤 걸린다. 배차 간격은 적지만 동서울터미널에서도 남해행 버스를 탈 수 있다. 진주(5,700원), 부산(11,900원), 대전(15,600원), 순천(6,200원) 등에도 남해를 오가는 버스가 있다. 남해 종합버스터미널에서는 창선(가인/수산) 방면 버스를 타면 된다.

터미널 연락처: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www.busterminal.or.kr) 02-521-8550, 남해시외버스터미널 863-5056, 남흥여객 863-3507, 창선 택시 867-1917, 남양 개인택시 010-9333-7088, 유자콜택시 863-0082, 콜택시 010-4111-6633

자가용:서울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다 대전JC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부산과 광주에서는 남해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출발지에 따라 하동IC, 사천IC, 진교IC로 진입할 수 있다. 사천IC로 진입할 경우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넌다. 구간 초입인 적량과 종점인 동대만휴게소에 무료 주차장이 있다.

기타 정보 (지역번호 055)

•몇 군데 마을을 지나지만 걷기여행 중엔 식수와 간식을 구할 곳이 마땅치 않다. 마실 물과 간식은 미리 배낭 안에 챙겨가는 게 좋다. 요즘처럼 볕이 강한 계절엔 챙 넓은 모자와 썬크림도 필수다.

•화장실은 적량해비치마을과 동대만휴게소 등에 있다.

•남해 바래길 리플릿은 남해군(www.namhae.go.kr)이나 바래길 사무국에 신청하면 우편으로 받을 수 있다. 남해 바래길(www.baraeroad.or.kr) 863-8778.

숙식정보 (지역번호 055)

구간 초입의 적량해비치마을(jukrang.co.kr)에 단체가 묵어갈 수 있는 체험관을 비롯 다양한 민박집이 있다. 자세한 민박집 상황은 홈페이지를 참고하거나 마을 사무장(010-3336-8660)에게 문의한다. 구간 종점인 동대리 일대에는 펜션이 많은 편이다. 간단한 식사는 동대만휴게소(867-4088)에서 가능하다. 남해군청 앞 미담(864-2277)은 정갈한 밑반찬과 함께 나오는 육개장(8천원)이 맛있다. 바래길을 최초로 제안하고 만든 사람이 ‘미담’ 주인장 문찬일씨다.


황소영 객원기자, 협찬 마운틴닥스 / hjhj@emount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