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大寒)을 코앞에 두고 뒤늦게 겨울다운 추위가 몰아 닥쳤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에 방심한 것도 잠시, 며칠 이어진 강추위에 마음 한구석에선 은근히 봄을 기다리게 된다. 엄동설한에 무슨 꽃이냐 하겠지만 남해안 도서에는 이미 동백꽃이 개화를 시작했다. 경남 통영에서도 아래자락, 장사도에서 올해 처음으로 동백꽃을 마주했다. 관광지로 개발한 이후 동백을 지칭하는 영어를 덧붙여 공식명칭은 ‘장사도 해상공원 까멜리아’다.
지난 12일 장사도로 가는 길에 충북 음성과 덕유산 부근엔 눈발이 날렸다. 이틀 뒤부터 올 겨울 최고 한파가 예고된 터였다. 대전통영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바다와 마주치자 날씨도 기온도 한 달은 건너뛴 듯하다. 바람이 좀 거세긴 했지만 차량 온도계는 영상 8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사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거제 대포항으로 길을 잡았다.
거제시내를 목전에 두고 길은 해금강 방향 남쪽으로 향한다. 4차선으로 시원하게 달리던 도로는 거제면소재지를 통과하면 2차선으로 좁아지고, 동부면소재지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꼬불꼬불 산길이 이어진다. 노자산(565m), 가라산(580m) 중턱으로 연결된 도로에서는 올망졸망한 포구들이 발 아래로 내려다 보여 속도를 줄이는 만큼 전망이 시원하다. 가로수로 심은 짙푸른 동백에 간간이 붉은 꽃송이가 눈에 띄는가 하면, 대포항을 목전에 두고 먼나무 가로수에는 새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계절을 가늠하기 힘들다. 산자락의 나뭇가지는 여전히 앙상한데 연하게 봄물이 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296명이 정원인 장사도 유람선에 탑승한 관광객은 모두 합쳐도 20명이 넘지 않은 듯했다. 스피커를 타고 울리는 선장의 안내 음성이 객실을 메우는 사이 갑판으로 나갔다. 몇몇 관광객이 새우 과자로 갈매기를 유혹할 틈도 없이 배는 이미 장사도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등 10만여 그루의 상록활엽수가 빼곡한 섬이 바다보다 짙푸르다. 길이 1.9km, 폭 400m 작은 섬은 길쭉한 모양대로 ‘뱀섬’, 혹은 누에에 비유해 잠사도(蠶絲島)로 불리기도 했다.
선착장에 내리면 잘 닦여진 산책로를 따라 산등성이로 오른다. 맞은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중앙광장에 ‘바다ㆍ섬ㆍ여인’이라는 조각상이 누워있다. 멀리 보이는 섬 ‘미인도’를 본 떠 만든 작품이란다. 바로 옆은 죽도국민학교 장사도분교가 있던 자리, 교실은 그대로지만 운동장은 분재공원으로 꾸몄다. 운동장 한 켠, 말뚝박기 놀이에 신이 난 아이들의 동상에서 재잘거림이 묻어난다. 한때 14채의 민가에 83명의 주민들이 살았다고 하니 실제 학생수도 그 언저리였을 듯하다.
학교 뒤편 숲은 철재기둥에 나무바닥을 깐 무지개다리로 연결된다. 빨간 페인트가 아직은 동백보다 돋보인다. 숲길을 돌아 3면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통과하면 길은 다시 무지개다리 아래로 돌아온다. 2005년부터 6년여에 걸친 공원개발과정을 담은 사진을 전시해 놓았다. 녹록하지 않았을 섬 생활의 흔적도 보인다. 온실을 돌아 내려가면 실제 주민이 살았던 ‘섬아기집’이 있다. 골격은 그대로지만 돌과 황토로 깔끔하게 마감해 곤궁했을 섬 집이라고 하기엔 살아보고 싶을 만큼 예쁘다.
섬 집 바로 위는 장사도의 상징 ‘동백터널’이다. 2014년 이맘때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등장한 곳이다. 드라마 영상처럼 발갛게 떨어진 꽃송이가 돌길 바닥을 레드 카펫으로 장식한 모습은 2월 중순부터나 볼 수 있을 거란다. 아직은 붉은 꽃송이가 그늘 속에 듬성듬성한 수준이고, 바닥에 떨어진 꽃은 더 드물다. 대신 터널 바깥쪽 해가 잘 드는 곳엔 망울을 터트린 꽃송이가 제법 달려 있다.
산마루에 자리잡은 야외공연장은 김정명 작가의 ‘머리12’라는 12개의 청동 두상이 호위하고 있다. 거대한 두상은 다양한 형상의 작은 조각을 연결해 만든 작품으로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인공 조형물로는 섬에서 가장 공을 들인 시설이다.
야외공연장 뒤편에는 분홍빛 애기동백이 만개해 동백터널에 살짝 실망한 여행객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슬며시 꽃잎을 풀다 툭 떨어지는 동백꽃과 달리 애기동백은 작은 체형과 잎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꽃잎을 활짝 젖혔다. 화사한 분홍 꽃잎 뒤로 펼쳐지는 바다색도 덩달아 봄 빛깔이다. 일본이 원산지인 애기동백은 꽃잎이 하얗지만 다양한 색상으로 개량해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야외공연장을 돌아 나가는 곳에는 미니어처처럼 자그마한 예배당이 자리잡고 있다. 1973년 장사도분교 옥미조 교사가 세운 교회로 83명의 섬 주민 중 70명이 이 교회를 다녔다고 하니 섬마을 선생님의 정성을 짐작할 만하다. 이쯤 둘러보면 슬슬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다. 선착장으로 내려가기 전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라도 한잔하면 좋으련만, 2시간을 기다린 유람선이 고동을 울려 이제 떠갈 시간임을 알린다.
▦장사도 여행길에 함께 볼만한 곳
거제 대포나 가배항으로 여정을 잡으면 둔덕면의 청마기념관에 들러볼 것을 추천한다. 청마 유치환의 고향인 방하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1908년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3살 때 통영으로 이사해 어린 시절을 보낸 덕에 ‘청마문학관’ 타이틀은 인근 통영이 선점했다. 이 때문인지 청마기념관 해설사는 이곳이 유치환 집안이 8대에 거쳐 살아온 곳이라는 사실을 유난히 강조한다. 문학관 앞마당의 동상 옆에는 그의 시 ‘출생기(出生記)’가 보란 듯이 새겨져 있고, 바로 뒤편은 2000년에 복원한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그의 묘소도 문학관에서 1.3km 떨어진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묘소까지 이어지는 길목에는 푸른 보리밭에 청마(靑馬) 3마리가 노니는 조형물을 설치했고, 곳곳에 그의 시비도 놓아 두었다. 고려 무신의 난 때 의종이 3년간 머물렀다는 거제둔덕기성과 산방산 사이 아담한 분지에 터를 잡은 마을 자체도 푸근함이 느껴진다.
통영으로 되돌아 나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가조도는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다. 연륙교로 이어진 작은 섬은 쉬엄쉬엄 해안도로를 한 바퀴 돌아도 30분이면 충분할 정도다. 섬 중간 잘록한 허리부분에는 ‘노을이 물드는 언덕’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서편 바다에는 실에 꿴 보석처럼 양식장 부표가 그림이고, 반대편으로는 빨간 지붕이 예쁜 창호리 갯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사도 여행 팁
-장사도는 행정구역상 통영시 한산면에 속하지만 거제에서 더 가깝다. 유람선은 통영 1곳, 거제 2곳에서 운항한다. 가장 가까운 거제 대포항에서 대포크루즈(지역번호 055, 633-9401)를 이용하면 10분, 거제 가배항에서 장사도유람선(638-1122)을 타면 20분, 통영 충무유람선터미널에서 통영유람선(645-2307)으로는 40분이 소요된다. -승선 요금은 비수기 평일 대인 기준 각각 1만 2,000원, 1만 6,000원, 2만 1,000원이고 매표할 때 장사도 입장료 1만원을 함께 지불해야 한다. 관광객이 몰리는 3월부터는 수시로 운항하지만, 요즘은 모든 항구에서 하루 2차례만 운항한다. 관광객이 없으면 출항하지 않는 날도 있으므로 전화로 미리 확인하는 것은 필수. -장사도는 내리는 선착장과 타는 선착장이 다르다. 화살표 방향으로 관람동선을 따라가면 실수할 일은 거의 없다. 관람시간은 2시간으로 정해져 있고, 꼭 타고 온 배로 되돌아 나가야 한다. 매표할 때 배 이름이 코팅된 패찰을 나눠주는데, 나올 때 검표원이 다시 확인한다. 2시간이 짧은 여행객들을 위해 올 3월부터는 시간에 관계없이 같은 항구로 되돌아가는 배만 타면 되는 자율관람제도 실시할 계획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남해안의 수려한 해양 자연경관을 보유한 거제와 통영의 주요관광지를 연결한 ‘글로컬 관광상품’을 개발했다. ‘사랑의 설렘, 한류 웨딩여행 & 남해안 낭만여행’이라고 명명한 상품에는 거제의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 전망대, 통영의 동피랑 벽화마을과 한려수도 케이블카 등이 포함돼 있다. 한편 거제와 통영은 부산, 남해와 더불어 ‘섬과 바람(가칭)’이라는 코스로 즐길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에도 선정됐다.
거제ㆍ통영=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mailto: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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