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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山책] 그곳에서 영혼의 불꽃을 다시 피우리

거울속의 내모습 2016. 12. 2. 22:46


소설 <혼불>의 배경지, 풍악산 자락의 노봉마을을 가다


혼불문학관에는 최명희 작가의 아늑한 서재가 재현되어 있다. Ⓒ신희수 기자

한바탕 소낙눈이 내렸다.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폐역에도, 흔한 파장 하나도 일지 않는 호수에도, 고요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뒷산에도 오랜만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들었다. 남원에서도 외곽 산골에 자리하고 있는 노봉마을. 한때 이곳에는 누군가의 뜨거운 혼이 가득했다. 강렬히 타올랐던 그의 ‘혼불’은 비록 꺼지고 말았지만, 그 온기는 여전히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한 사람의 혼이 서려 있는 대하소설 <혼불>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좀처럼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아놓은 자료만을 어지럽게 쌓아둔 채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한눈을 팔던 처음과 달리, 거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 -최명희

최명희 작가의 소설 <혼불>은 그가 고백한 것처럼 한 자 한 자 열정을 담아 써내려간 대하소설이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며 세상에 처음 소개된 이 소설은 1996년 12월, 총 5부 10권으로 출간되었다.

자그마치 17년의 세월이 녹아들어간 <혼불>의 주요 내용은 일제 감정기인 1930~40년대 전라북도 남원 지역의 유서 깊은 가문인 ‘매안 이씨’ 문중에서 무너져가는 종가를 지키는 종부 3대와,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면서 살아가는 상민마을(거멍굴) 사람들의 삶 이야기이다.

소설 속 주 무대는 남원 노봉마을. 이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서정적으로 펼쳐진다. ‘1990년대 최고의 책’으로 평가받는 <혼불>을 글뿐만이 아닌 눈으로도 담고 싶어 노봉마을로 향했다.




1932년에 지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역사 서도역. <혼불>에서는 효원이 이곳으로 신행을 올 때 이용한 역으로 묘사되었다. Ⓒ신희수 기자

마을 사람들의 사연이 머무르는 서도역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점잖은 한 밥상 천천히 다 먹을 만한 동안을 걸으면 정거장에 닿는다. 전라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이곳에 정거장이 생긴 것이다.

- 혼불 中에서



이제는 폐역이 되어 아무것도 지나지 않는 서도역 기찻길에 눈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신희수 기자
































최명희 작가는 서도역을 이렇게 묘사했다. 노봉마을 입구에서 약 1km, 2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하는 이 역은 자연스레 마을의 길목 역할을 했다. 소설의 등장인물 효원이 강모와의 혼인을 위해 이곳 마을로 신행을 올 때도, 강모가 전주로 학교를 다닐 때도 이 역에 발을 들였다.

이야기의 주요 거점이 되는 서도역은 1934년 역무원이 배치되며 간이역으로 처음 영업이 시작되었고, 이후 수십 년간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이 되어주었다. 2002년 전라선 직선화 공사로 인근에 새로운 역사가 조성되면서 옛 역사는 철거될 계획이었으나, 당신 남원시가 <혼불>의 배경지로 꾸미기 위해 철도공사로부터 이 역과 주변 부지를 매입했다. 이후 2010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미술협회와 협업해 <혼불>을 상징하는 미술작품과 부대시설을 설치하며 ‘영상 촬영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구 서도역을 보기 위해 노봉마을에 들어서기 전 이곳부터 찾았다. 서도역으로 향하는 골목 어귀에는 작은 시골집들이 올망졸망 서 있고 한쪽 담장에는 이곳을 지나던 전라선 기차가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있다. 길게 이어진 그림을 따라가면 ‘혼불 숭어리들름터’라는 이름의 방문자센터가 보이고, 바로 그 앞으로 구 서도역이 자리하고 있다.


<혼불>의 주 무대인 노봉마을은 풍악산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자리라 불린다.

Ⓒ신희수 기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낡은 목조로 된 역 대합실. 안으로 들어서니 기차 시간이 표기된 매표소가 보이고, 사방의 벽면에는 이곳을 찾았던 이들의 방문소감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하나같이 옛 추억을 되살리고 간다는 내용이다.

대합실을 빠져나와 기찻길을 따라 걸어본다. 복잡하게 얽힌 선로처럼 수많은 사람과 사연이 이 길을 통해 오갔을 것이다. 이제는 텅 비어 있는 서도역에 때마침 소낙눈이 내리며 잠시나마 허전함을 채워준다. 낯선 곳으로 시집을 오는 효원과 아내를 두고 타향으로 떠나는 강모는 이 역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산봉우리의 기맥이 흘러내리는 노봉마을


노봉마을 초입에는 <혼불>의 탄생지를 알리는 타일벽화가 그려져 있다. Ⓒ신희수 기자
































서도역에서 서남쪽으로 20여분을 걸으니 아담한 노봉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뒤로 솟은 풍악산 노적봉은 하얀 눈옷을 입어 아름다운 경치를 뽐내고 있다. 최명희 작가 역시 노봉마을의 아름다움을 소설 속에 '아른아른한 아지랑이가 향불 연기처럼 오르는 마을의 뒤쪽으로, 벼슬봉과 노적봉, 선녀봉들이 물결을 이루며 마을을 병풍같이 두르고 있다. 그 봉우리들의 소나무 빛깔이 신맛이 돌게 푸르다'고 묘사했다.

이처럼 노봉마을은 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다른 지형보다 약간 높게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소설의 공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적용된다. <혼불>에서는 가장 높은 곳인 노봉마을을 양반촌(매안마을)으로, 그보다 낮은 지형을 민촌(고리배미)과 천민촌(거멍굴)으로 구성해 계급이 낮은 천민이 양반을 올려다보는 형세로 설정되었다. 당대의 계급사회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양반촌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종가는 청암부인과 율촌댁, 그리고 효원과 강모가 거주하는 곳으로 소개된다. 실제로 종가에 다다르니 마을 전체와 저 멀리 들판까지 보인다. 청암부인은 마을 앞 드넓게 펼쳐진 들판에 대해 강모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그 들판은 매화낙지다. 산에 가로 막혀서 더 뻗어나가지 못한 것이 서운은 하다만, 땅의 지세가 아주 좋으니라.'

'매화낙지?'

'매화 매(梅), 꽃 화(花), 떨어질 락(落), 따 지(地), 그렇게 쓰지.'

'꽃이 떨어지는데 무엇이 좋은가요?'

'이 사람아, 꽃은 지라고 피는 것이라네. 꽃이 져야 열매가 열지. 안 그런가? 내 강아지.'

-혼불 中에서


소설 속 청암부인, 율촌댁, 효원과 강모가 거주하던 종가. 노봉마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신희수 기자


노봉마을이 속한 남원 사매면은 예로부터 ‘매화꽃이 떨어지는 지형(梅花落地)’의 좋은 땅이라 여겨졌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봉마을은 소설 속에서 ‘매안마을’이라고 불린 것이다. 최명희 작가는 마을 뒤로는 노적봉이 솟아 있고,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있는 자신의 본향(本鄕)을 주 배경으로 소설을 써낸 것이다.

하지만 노봉마을에는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물이 부족해 농사짓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100여년 전, 마을 한편에 저수지를 만들어 이후부터 농업용수로 사용되었다. 소설 속에는 청암부인이 마을 뒤 노적봉과 벼슬봉의 산자락 기맥을 가두기 위해 2년간 큰 못을 팠다고 설명되어 있다.

서북으로 비껴 기맥이 흐를 염려가 놓였으니, 마을 서북쪽으로 흘러내리는 노적봉과 벼슬봉의 산자락 기운을 느긋하게 잡아 묶어서 큰 못을 파고, 그 기맥을 가두어 찰랑찰랑 넘치게 방비책만 잘 강구한다면 가히 백대 천손의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歲享)을 누릴만한 곳이다 하고 이르셨다.

-혼불 中에서



마을 한편에 위치한 청호저수지는 풍악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기맥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다. Ⓒ신희수 기자

<혼불>의 모든 것을 담아낸 문학관

고요함으로 가득한 청호저수지를 한 바퀴 걸은 뒤 마지막으로 혼불문학관에 들어선다. 긴 세월을 오로지 <혼불>에 집중했던 최명희 작가는 지병으로 1998년, 안타깝게 절명했다. 남원시는 그를 기리기 위해 2004년, 이곳에 혼불문학관을 조성했다. 노적봉으로 오르는 길 위에 자리한 문학관은 깔끔한 한옥으로 지어져 단아함이 묻어난다.



혼불문학관은 최명희 작가를 기리고 소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 2004년 개관되었다. Ⓒ신희수 기자
그의 생애와 <혼불>의 내용이 자세하게 설명된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친필 원고와 만년필이 눈에 들어온다. 문학관 해설사 김주완씨는 '최명희 작가님은 원고를 쓸 때 항상 만년필을 고집하셨어요. 우리의 민족문화를 글로 표현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서 모든 내용을 직접 손으로 정성스레 쓰려고 노력하셨죠'라며 작품에 묻어있는 진정성을 강조했다.

실제로 그의 친필 원고에는 수많은 교정부호가 적혀 있어 단어 하나하나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이러한 최명희 작가의 성향이 담긴 자료집이나 수첩 역시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그의 서재를 재현해 놓은 공간에서는 정갈한 성품이 그대로 느껴진다.


교정 흔적이 가득한 최명희 작가의 친필 원고지에서 그의 고뇌가 느껴진다. Ⓒ신희수 기자




문학관에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 같다'고 말한 최명희 작가를 위로하고자 이름 붙인 ‘새암바위’가 서 있다. Ⓒ신희수 기자
서재를 지나서부터는 <혼불> 속 주요 장면을 담은 디오라마(축소 모형)가 이어진다. 강모와 효원의 혼례식, 강모·강실의 소꿉놀이, 효원의 흡월정, 액막이연 날리기, 조개바우와 펜돌이, 강수 명혼식, 청호지 고갈, 춘복이 달맞이, 쇠여울네 종가 마루찍기, 청암부인 장례식의 총 10장면이 표현되었다. 책 내용까지 음성으로 더해져 생동감 있는 소설 속 장면을 만날 수 있다.

전시관에서 최명희 작가의 열정과 혼을 온몸으로 느끼고 나니 오히려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든다. 아직 ‘미완의 이야기’인 <혼불>을 덧붙여줄 주인공이 없다는 사실 때문일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새암바위 앞에 선다. 한바탕 눈이 거쳐 간 노봉마을 전체에 그의 온기가 감돈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만일 그것이 어는 날인가 새암을 이룰 수만 있다면, 새암은 흘러서 냇물이 되고, 냇물은 강물을 이루며, 강물은 또 넘쳐서 바다에 이르기도 하련만,

그 물길이 도는 굽이마다 고을마다 깊이 쓸어안고 함께 울어 흐르는 목숨의 혼불들이, 그 바다에서는 드디어 위로와 해원의 눈물 나는 꽃빛으로 피어나기도 하련마는, 나의 꿈은 그 모국어의 바다에 있다.

어쩌면 장승은 제 온몸을 붓대로 세우고, 생애를 다하여, 땅속으로 땅 속으로, 한 모금 새암을 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마을, 그 먼 바다에 이르기까지……' -최명희



문학관 해설사 김주완씨는 2012년 5월부터 이 자리를 지키며 최명희 작가의 뜻을 알리고 있다. Ⓒ신희수 기자

Information

작가 최명희와 <혼불>

소설 <혼불>은 최명희 작가가 우리 선조들의 숨결과 손길, 염원과 애증을 우리말의 아름다운 가락으로 생생하게 복원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며 세상에 처음 소개되었고, 1988년 9월부터는 제2부가 월간 <신동아>에 연재되기 시작해 1995년 10월까지 만 7년 2개월 동안 계속되어 국내 월간지 사상 최장기 연재기록을 수립했다. 이후 새로 집필한 분량이 더해지고 기존 출간분도 수정·보완되어 1996년 12월, 한길사 출판사에서 총 5부 10권으로 출간되었다. <혼불>은 교보문고가 진행한 ‘1990년대 최고의 책(1999년)’에 선정되었으며, 작가 최명희는 옥관문화훈장(2000년)으로 추서되는 등 국내 문학계에 큰 획을 남긴 작품이다.

□작가 최명희 연보

□작가 최명희 연보

최명희 작가는 끝내 완간을 이루지 못하고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신희수 기자
1947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 (10월 10일)

1972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0

<쓰러지는 빛>,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1981

<혼불> 동아일보 장편소설 공모전 당선

1988

<혼불> 제2부, 월간 신동아 연재 시작

1996

<혼불> 책 출간 (총 5부, 10권)

1997

제11회 단재상 수상

전북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 수여

제16회 세종문화상 수상

1998

제15회 여성동아대상 수상

호암상 예술부문 수상

난소암으로 별세 (12월 11일)

1999

<혼불> ‘1990년대 최고의 책’으로 선정 (교보문고)

2000

옥관문화훈장 수여

혼불문학관

노봉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혼불문학관은 최명희 작가를 영원히 기리고, <혼불>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지난 2004년 10월 개관되었다. 당시 사업비로 약 47억 5천만원이 사용되었으며, 총 부지면적이 1만 7천㎡에 달한다.

문학관은 크게 전시관과 관리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레방아와 분수 연못, 실개천 등의 부대시설로 구성되었다. 전시관 내부에는 소설 속 주요 장면(혼례식, 청암부인 장례식, 달맞이 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디오라마(축소 모형)가 설치되어 있으며, 최명희 작가의 소개와 함께 그의 집필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노봉안길 52

-전화: 063-620-6788

-운영시간: 오전 9시~오후 5시(월요일 휴관, 무료 관람)

-홈페이지: www.honbul.go.kr

권상진 기자 / dhunhil@emount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