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 진 ♡/국내여행가이드

오색 터널 '석굴암 가는 길' 영국 찰스 왕세자도 감탄 했지요

거울속의 내모습 2016. 11. 6. 21:31


        경주의 만추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은 그윽한 숲길로 연결돼 있다. 경주 시민만 아는 명품 단풍길이다.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은 그윽한 숲길로 연결돼 있다. 경주 시민만 아는 명품 단풍길이다.
경주로 떠나는 단풍여행은 그윽한 숲길 두 곳을 느긋이 걷는 일이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잇는 토함산 숲길과 함월산 수렛제를 넘는 고갯길은 굳이 신라 역사를 몰라도 걷기에 좋은 길이다. 경주 시내를 내려다보는 두 산 단풍이 이렇게 곱고 화려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왕의 자취를 되밟다  | 함월산 왕의 길
계곡을 곁에 두고 걸을 수 있는 왕의 길.
계곡을 곁에 두고 걸을 수 있는 왕의 길.
신라시대 경주 시내에서 동해 바다에 닿으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산이 있었다. 함월산(584m)이다. 지금이야 터널도 뚫고 도로도 놔서 함월산을 넘지 않아도 바다로 나갈 수 있지만, 신라시대에는 오로지 산을 넘어야 바다를 품을 수 있었다.
왕도 예외일 수 없었다. 신라 31대 신문왕(?∼692)도 함월산을 넘어 동해로 향했다. 신문왕에게 함월산 고갯길은 아버지를 만나는 길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룬 30대 문무왕(626~681)이 신문왕의 아버지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선친의 유언에 따라 아들은 경주 양북면 봉길리 앞 동해 바다 한가운데 아버지를 묻었다. 세계 유일의 수중릉인 문무대왕릉이다. 신문왕이 문무대왕릉으로 향했던 그 길이 오늘도 ‘왕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왕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기림사.
왕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기림사.
신문왕처럼 산을 타고 바다로 나가려면 추령터널 옆 진입로로 들어서야 한다. 진입로에서 2.5㎞ 정도 산으로 들어가면 왕의 길 초입 모차골에 닿는다. 왕의 길은 모차골부터 선덕여왕 12년(643)에 창건한 기림사까지 편도 5.1㎞ 이어져 있다.

“『삼국유사』에 신문왕이 문무대왕릉에서 궁으로 돌아갈 때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토함산과 함월산 사이 계곡을 따라 기림사까지 이어진 완만한 산길이 그 시대 신문왕이 행차했던 길로 추정됩니다.”

해설사 김영식(36)씨는 추령터널이 개통하면서 인적이 뜸해진 산길을 경주국립공원관리소가 정비해 2012년 탐방로로 개통했다고 소개했다.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아 경주 시민 일부만 드나드는 산책길이란다.

모차골에서부터 운치 있는 산길이 이어졌다. 옻나무·참나무 등 활엽수가 누르스름한 색감을 뽐내고 있었다. 완만한 산길을 오르다 얕은 계곡을 건너고, 계곡을 건너면 푹신푹신한 흙길이 이어졌다. 나무계단이나 시멘트도로 등 인공 조형물이 거의 없어 숲길을 걷는 기분이 제대로 났다. 모차골에서 10분쯤 산으로 들어오니 휴대전화도 먹통이 됐다. 새소리와 계곡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일행이 낙엽 밟는 소리만 이따금 들려왔다.

숲은 깊었지만 길은 잘 나 있었다. 임금의 마차와 수레가 다녔던 길이었으므로 대체로 평평하고 널찍했다. 마차와 수레가 쉬어갔다는 수렛재, 수레를 끌던 말이 굴러 넘어졌다는 말구부리, 신문왕이 몸을 깨끗이 씻고 갔다는 세수방 등 신문왕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숲 좋고 단풍 좋고 길도 좋은데, 이야기까지 얹혀 있어 지루한 줄 모르고 걸었다.
함월산 용연폭포. 신문왕과 관련된 전설이 깃든 장소다.
함월산 용연폭포. 신문왕과 관련된 전설이 깃든 장소다.
모차골부터 1.4㎞ 떨어진 수렛재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고 수렛재부터 기림사까지 3.7㎞ 이어진 길은 더 완만한 내리막이었다. 기림사로 들어서기 직전 장쾌하게 물을 쏟아내는 용연폭포를 마주쳤다. 낙폭 3m쯤의 폭포는 주변의 단풍나무와 어우러져 신비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김영식 해설사가 폭포에 얽힌 전설을 말해줬다.

“동해에 다다른 신문왕은 용으로 변한 문무왕에게서 대나무와 옥대를 건네받습니다. 이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신라의 국보 만파식적입니다. 만파식적을 불면 적군이 물러났다고 하지요. 신문왕이 옥대에 붙은 장식을 연못에 넣었더니 용이 나타났다고 전해지는 장소가 여기 용연폭포입니다.”

막힘없이 동해로 흘러가는 폭포수처럼, 신문왕도 역경 없는 신라를 꿈꿨을 것이다. 위용 있는 절이나 번듯한 불상 하나 없는 길 위에서 신라를, 경주의 가을을 제대로 만났다.

■탐방정보

「왕의 길은 모차골에서 기림사까지 편도 5.1㎞ 길이의 숲길이다. 추령터널 입구 옆에 모차골 진입로가 있다. 찻길을 따라 2.5㎞쯤 들어가면 인자암이 나온다. 인자암 오른쪽 공터가 주차장이고, 왼쪽으로 탐방로 입구가 있다. 대중교통으로도 닿을 수 있다. 경주버스터미널에서 감포·어일 방면으로 가는 100·150번 버스를 탄 다음 추령터널 입구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추령터널 입구에서 모차골까지 어른 걸음으로 40분 걸린다. 모차골에서 기림사까지 4시간이면 왕복할 수 있다. 기림사에서 나오려면 기림사 정류장에서 130번 마을버스를 타고 어일정류소에 내리면 된다. 어일정류소에서 100·150번 버스로 갈아 타고 경주버스터미널로 되돌아올 수 있다.」


부처님의 세상으로  | 토함산 석굴암 가는 길
토함산 정상. 억새밭 사이로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토함산 정상. 억새밭 사이로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신라인은 토함산(745m)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았다. 토함산(吐含山)이 매일 토하고 품은 것이 바로 태양이다. 해를 생산하는 산이었으므로 토함산은 신라인에게 신성한 공간이었다. 신라인이 남산(494m) 자락에 150개가 넘는 절터를 닦았지만, 토함산에는 사찰 2개만 세운 까닭이다. 토함산 자락에 들어선 두 절이 바로 불국사와 석굴암(석불사)이다.
단풍나무를 곁에 두고 걷는 불국사 담장 길.
단풍나무를 곁에 두고 걷는 불국사 담장 길.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했던 1973년 불국사에서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2차선 포장도로가 개통하면서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두 시간 만에 후딱 돌아보는 관광 코스로 전락했다. 오늘도 관광버스를 타고 다니는 단체여행객은 불국사를 한 바퀴 둘러본 뒤 버스를 타고 석굴암을 올랐다가 바로 내려온다.
단풍나무 터널이 드리운 불국사 숲길. 지난 1일 촬영했다. 이달 중순께 단풍이 절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단풍나무 터널이 드리운 불국사 숲길. 지난 1일 촬영했다. 이달 중순께 단풍이 절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국사와 석굴암 사이에는 잊힌 길이 있다. 불국사 정문 주차장과 석굴암 주차장을 잇는 산길이다. 2.2㎞에 이르는 산길은 ‘석굴암 가는 길’ ‘불국사길’ ‘석굴암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차량 출입은 금지됐고 오로지 사람만 오르내릴 수 있다. 불국사 정문 앞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쉬엄쉬엄 오르면 석굴암 입구에 다다른다.
빨갛게 익은 백당나무 열매.
빨갛게 익은 백당나무 열매.
불국사와 석굴암을 잇는 숲길이 언제 어떻게 조성됐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해설사 심명희(53)씨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중창됐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해지는데, 이 길도 그 즈음부터 신라인이 오르내리던 길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고만 전했다.
심씨는 경주 사람도 가을이면 이 길을 걸으려고 불국사로 향한다고 귀띔했다. 길에 드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석굴암 가는 길은 전국의 어느 단풍 명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단풍길이었다. 2차선 도로만큼 널찍한 길 양옆에 단풍나무가 길게 드리워졌다. 본래 좁은 산길이었는데 81년 불국사 청년회원이 불국사에서부터 1㎞ 구간에 단풍나무 380그루를 심어 단풍길을 조성했단다. 무릎 언저리에 닿던 묘목은 이제 단풍터널을 이룰 정도로 무성해졌다. 단풍이 절정에 이르면 파란 가을 하늘에 붉은 띠가 드리울 듯했다.
석굴암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오동수 약수터.
석굴암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오동수 약수터.
30분 정도 단풍길을 걸어 오동수 약수터에 다다랐다. 토함산 정상에서부터 내려온 약수로 목을 축이고 돌계단을 따라 올랐다. 이 구간은 인공 조림지역이 아닌데도 단풍이 고왔다. 굴참나무·떡갈나무·신갈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울긋불긋 서로 다른 색감을 뽐냈다. 길 끝은 석굴암 주차장으로 이어졌다. 주변 산줄기와 동해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재상 김대성은 토함산 정상 바로 밑 해발 575m 부근에 석굴암을 만들고 부처를 모셨습니다. 토함산을 오르는 고행을 무릅쓴 자만이 부처를 만나고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하려던 것이죠.”
단풍이 물든 불국사 경내.
단풍이 물든 불국사 경내.
숨을 돌리고 석굴암 불상을 마주했다. 산마루에 있는 부처를 만나기 위해 걸어온 길은 고행보다 행운에 가까웠다고 기도를 드렸다. 해설사 심명희씨가 석굴암 가는 길과 영국 찰스(64) 왕세자의 인연을 말해줬다. 92년 한국을 방문한 왕세자는 자동차를 타고 석굴암 앞까지 왔다. 석굴암에서 감동을 받은 왕세자는 “석굴암에 닿는 길이 찻길밖에 없느냐”고 물었다. 석굴암 부처가 고행 끝에 만날 수 있는 평화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질문이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잇는 숲길을 알아낸 왕세자는 이후 일정을 취소하고 불국사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먼 나라의 왕세자가 이 길을 걸었던 때가 11월이다. 마침 토함산 단풍이 한참인 계절이었다.

■탐방정보

「석굴암 가는 길은 불국사 정문에서부터 석굴암 주차장까지 2.2㎞에 이르는 산길로 1시간이면 오를 수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마을버스로 연결된다. 금화교통이 운영하는 12번 버스가 불국사 팔각정 관광안내소에서 석굴암 주차장 사이를 오간다. 편도 20분 걸린다. 어른 1700원. 불국사 앞에서 오전 8시 40분부터 오후 5시 40분까지 매시 40분 출발하고, 석굴암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시 정각 출발한다. 불국사·석굴암 입장료 각 어른 5000원. 석굴암 입구 왼편으로 이어지는 토함산 산길도 걸을 만하다. 토함산 정상까지 완만한 산길이 1.6㎞ 이어진다. 토함산 소나무의 솔향을 맡으며 걸을 수 있다. 왕복 1시간 정도 걸린다.」

글=손민호·양보라 기자 ploveson@joogn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gn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