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 진 ♡/세계여행가이드

2화. 당신과 함께 떠나렵니다

거울속의 내모습 2015. 6. 3. 23:38

오래된 친구가 이탈리아에 왔습니다. 지난 몇 년 힘들어 하던 친구를 몇 번이나 이탈리아로 초대했습니다. 그리 말해 주어 고맙다고만 말하며 떠나 올 줄은 모르던 친구가 이번엔 마음을 먹어주었습니다. 한 달 이란 시간, 이탈리아의3월..봄이 다가오는 계절을 담고 갔습니다. 오기만 하라고 편하게 쉬다 가라 했지만 친구가 잠이 들기 전,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묻고 있었습니다.

"내일의 계획은 뭐야?" "오늘은 뭐할 거야?"
하루는 친구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냥 뭘 할지..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면 안 되는 거야?"
직업이 가이드다 보니 이탈리아에 볼 것도 느낄 것도 많다며 저도 모르게 친구를 부추기고 있었나 봅니다.배우고 경험하는 것도 여행의 한 모습이지만……온전히 그 하루를 느껴보는 것도 여행의 방법임을 잊고 있었나 봅니다.

오래된 친구와 길을 떠납니다.그저 바라보고 걸어보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 보려합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안드레아 보첼리의"time to say goodbye".
그는 노래합니다.

"Time to say goodbye
안녕이라 말해야 할 시간
Paesi che non ho mai
내가 한번 보았고
Veduto e vissuto con te
당신과 함께 살았던 나라
Adesso si li vivro
지금부터 나는 거기서 살렵니다
Con te partiro "
당신과 함께 떠나렵니다
오늘의 이 여정이 친구의 고민,힘듦,불안에 안녕이라 말하는 시간이 되기를..


이른 아침 차에 올라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아직 토스카나의 평야는 펼쳐지지도 않았는데 친구는 고속도로 창 밖의 풍경만으로도 카메라에서 손을 때지 못합니다. 잠시 휴게소에 들려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잔,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는 어딜 가나 맛있다지만 아침 일찍 떠난 여행길에 휴게소에서 마시는 에스프레소 맛은 언제나 최고입니다.

동료 가이드가 이탈리아에서 와서 처음 맛보는 에스프레소의 쓰디쓴 맛에 깜짝 놀라자 곁에 있던 한 신사분이 그랬다죠.

"인생은 쓴 거야..에스프레소를 마신다는 건 인생을 마신다는 것이야."

이 말을 듣고 너무나 멋져 항상 쓰디쓰게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저에게 이탈리아 친구가 설탕을 넣어주며 말합니다.

"la dolce vita,인생은 달콤한 거야."

자, 오늘은 설탕을 듬뿍 넣어서 에스프레소를 마십니다. 달콤한 하루가 펼쳐지기를 기도하는 주문입니다.

조금 더 달리자 차는 고속도로를 지나 국도로 접어 듭니다.바퀴 아래로 타닥타닥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들리고…도로 양 옆의 평야는 더욱 짙어지고…그와 함께 하늘은 더욱 푸른빛을 띱니다.


↑ 차가 멈춘 곳은 토스카나 주의 시에나(Siena)시에 속해있는 발 도르챠 차가 멈춘 곳은 토스카나 주의 시에나(Siena)시에 속해있는 발 도르챠 (Val d'Orcia)

봄의 이탈리아를 사랑합니다.봄의 이탈리아 하늘에는 사람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구름이 펼쳐지고 머리 칼 사이로 내가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만드는 바람이 불어옵니다.

지역의 전망대 입니다. 멀리 굽이치는 길 옆으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펼쳐집니다. 토스카나의 풍경은 신기합니다. 토스카나의 자연은 어찌 신이 이런 자연을 만들어 놓았나 감탄하게 되는 자극적인 풍경도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원시의 풍경도 아닙니다.

그저 끝도 없이 굽이 치는 평야, 드믄드믄 펼쳐지는 올리브 나무와 포도밭,그리고 줄지어 서있는 사이프러스 나무 어쩌다 하나씩 보이는 농가, 이것이 다 입니다.

그럼에도 이 곳의 풍경이 주는 감동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토스카나 대지의 품 안에서 자연과 인간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이 땅이 내어주는 딱 그만큼,그 이상에는 욕심을 내지 않고 그 안에 충분히 만족하며..

대지가 쉴 때면 이탈리아 사람들도 함께 멈추고 포도와 올리브가 열리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토스카나의 태양과 땅과 함께 키워나갑니다. 왠지 모든 것에 너무 애쓰지 말라고 잠시 멈추어 서면 남은 것은 자연의 몫이라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토스카나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어쩌면 위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은 이제 국도를 벗어나 하얀 먼지가 앞을 가리는 시골 길로 접어 듭니다.
그리고 창 밖으로 펼쳐진 집 한 채..


아버지가 셀 수 도 없을 만큼 돌려 보셨던 그 영화,글래디에이터, 가족 다 함께 앉아 보았던 주말의 명화 시간이면 시작과 동시에 녹화 버튼을 누르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바싹 다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녹화 한 비디오 테이프는 매번 다른 영화들로 다시 덮여 녹화되었지만 글래디에이터 만큼은 아직도 텔레비전 아래 선반에 꽂혀있습니다. 주인공 막시무스의 집을 바라봅니다.

20대의 여행과30대의 여행의 가장 큰 차이는 체력임을 무시 할 수 없으나, 하나 더 더하자면20대의 여행은 저의 즐거움으로만 가득 찼다면30대의 여행은 언제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fattoria dei barbi"
바르비 와이너리에 도착했습니다.


↑ 피에몬테(Piemonte)지방의 바롤로(Barolo),바르바레스코(Barbaresco)와 함께 이탈리아3대 와인,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

100%몬탈치노(Montalcino)지역에서 재배된100%산죠베제(San Giovese)라는 포도품종으로 만드는 와인으로 최소2년 숙성 후 다시 병에서4개월 숙성시키고 포도 수확5년차1월에 출시하도록 엄격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몬탈치노 뿐 아니라 토스카나의 대부분의 중세도시들은 산꼭대기에 위치한 완벽한 요새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로마시대 이전 에투르리안의 역사로 인해 도시 아래엔 그들의 유적이 잠자고 있습니다.

이 지하에서 잠자고 있던 유적들은 로마시내 로마인들의 와인 저장고로 다시 깨어 납니다. 미로 같은 지하로 내려서면,한기와 함께 텁텁한 오크 통의 향과 끈적한 포도 내음은 그만으로도 얼큰하게 취할 것만 같습니다. 지하 저장고의 마지막에 연도 별로 와인을 보관하고 있는 방이 있습니다.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와인 병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모습만으로 이 곳의 시간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딸이 태어난 해,그 딸의 결혼식을 위해 저장해둔 와인 병들을 보고 있자니..이들 삶의 가장 큰 목적은 가족이구나 싶었습니다.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을 자주 잊곤 하는 건 아닌지...

한국에서 와인을 마실 때면 종종 "와인이 가볍다,묵직하다"라는 용어를 쓰게 되는데요.이탈리아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이탈리아에서도 와인을 마실 때 이렇게 표현하는지..좋은 와인을 말할 땐 무어라 말하는지..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주 좋을 땐"vine important"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important"는 영어의"important"와 같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쓰이지만"great"의 뜻으로도 사용됩니다.그리고 덧붙여 말하길..

"우리는 와인이 무겁다고 말할 땐 다 함께 식사하며 마시기엔 너무 진하다라고 할 때 그렇게 말해.음……다 함께 이야기하며 함께 마시기 편한 게 좋은 와인 아냐?"

와인저장고에서 나와 와인시음을 해봅니다.와인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좋은 사람들 오래된 친구 멋진 풍경과 함께 와인을 마시니 모두가 좋은 와인입니다.이 순간 와인은 우리의 여행에 가장 중요한 흥을 더해주는 존재가 되어 줍니다.

와이너리에서 몇 걸음 밖에 포도밭이 있습니다.포도 밭에 서서 흙을 만져보고 놀랐습니다.예상과 달리 척박한 땅,하얗게 말라버린 물기가 하나도 없이 바스러지는 흙.수 많은 자갈들..이탈리아의 여름은 완벽한 건기입니다.물론 겨울에는 장마비가 오지만 앞으로 몇 개월 비가 없이 강렬한 태양이 지속 될 것입니다.


물기가 없고 자갈이 많은 땅에서 자란 이곳의 포도들은 유난히 더 포도 알이 작습니다. 작지만 이렇게 자란 포도들은 알차고 자갈의 미네랄들로 더욱 맛이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 포도들은 부드러움 속에 풍부하고 깊은 향과 맛을 담은 와인이 됩니다.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자 입안 가득 와인이 퍼지며 네가 강인해지고 깊어지고 그 속에 부드러움까지 갖추기 위해선 자갈 밭과 강렬한 태양과 목마름을 견뎌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해 텁텁하게 혀 안에 감기다가 너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일은 결국 너의 생을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 줄 거야 다시 위로해 주며 목구멍 뒤로 부드럽게 넘어갑니다. 거친 듯 부드러운 감동,이 맛에 와인을 마시나 봅니다.

평야를 지나 언덕 위로 오르자 중세 도시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해발500미터 이상의 고지에 그림처럼 솟아있는 몬탈치노,시에나와 피렌체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작은 도시 몬탈치노는 그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마을 전체가 일종의 요새화되어 산꼭대기에 지어졌습니다.

14세기부터16세기까지 한창 번성했을 때 마을 전체를 둘러쳤던 성벽과 망루들이 지금도 남아있는 이곳에서5000여명의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당한 취기와 투박하지만 든든해 보이는 벽에 기대어 잠시 쉬어 봅니다.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을 멈춘 곳은 피에첸자 입니다. 도시 곳곳 아기자기한 가게들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특히 가이드님이 추천해 준 치즈가게, 인심 좋게 툭툭 썰어 주는 페코리노 치즈 위에 무화과로 만든 발사믹 꿀을 얹어 먹는 맛은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합니다. 작년 피에첸자 치즈 대회에서1등을 했다는 페코리노 치즈는 영국에 사는 이탈리아 친구네 부부를 위해 선물로 구입을 했습니다. 며칠 뒤 영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선물 받은 치즈가 너무나 맛있어 그 자리에서 다 먹고 말았노라고….

마을 전망대에서 마지막으로 토스카나의 대지를 마음에 담습니다.

이제 로마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돌아오는 차 안의 창 너머로 노을이 집니다.

"canto della terra" (대지의 찬가)에서 안드레아 보첼리는 노래 합니다.

"우리는 창 밖 세상을 바라보며 
하늘의 소리를 듣습니다.
모든 것이 깨어나고
밤은 저 멀리로 물러났습니다.
이미 저 멀리
이 세상을 보세요
우리와 함께 하는 세상을
어둠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 세상을 보세요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상을
우리에게 희망인,태양을.."


12세에 사고로 시력을 잃은 안드레아 보첼리, 그가 부르는 이 노래를 듣고 있자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토스카나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합니다. 아마도 그건12살 소년의 기억 속 풍경을 노래하기 때문이겠죠.다시 보지 못할 추억의 풍경처럼 그의 노래에는 어쩐지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납니다.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오늘 하루 찍은 사진을 다시 보고 있는 친구를 바라보며..친구의 토스카나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토스카나가 아닌 또 다시 함께 서서 바라 볼 수 있는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관련여행:이태리 토스카나 투어
처 : 유로자전거나라

글 유로자전거나라 김민주
사진 유로자전거나라 권순찬,임성일


글쓴이 김민주 가이드는

중학교 때부터 꿈꿔왔던 이탈리아 2006년 여름 자전거나라에 문을 두드려 이탈리아 가이드로 활약하게 되었고 자전거나라 최초의 커플가이드에서 부부가이드로 그리고 현재 한 아이의 엄마로 매일 이탈리아를 재발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