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 진 ♡/국내여행가이드

초록빛에 물들고, 나무향에 취해 걷는다

거울속의 내모습 2016. 9. 2. 21:56
초록빛에 물들고, 나무향에 취해 걷는다
담양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다. ‘그림자를 쉬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곳을 선인들은 ‘강 위에 띄어진 꽃배와 같다’고 묘사했다. 송강 정철은 식영정에서 가사 성산별곡을 썼다.
하루아침에 가을이 왔다. 무더위가 물러간다는 이렇다 할 징후도 없었는데 갑자기 날이 선선해졌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무더위 탓에 외출을 피했지만, 어느새 나들이하기에 최적의 계절이 다가왔다. 가을은 짧다. 짧은 가을의 선선한 날씨를 만끽하는 데 걷기만큼 좋은 것은 없을 듯하다. 곧게 뻗은 대나무로 유명한 전남 담양은 대표적인 한국 전통 민간정원인 소쇄원과 죽녹원, 관방제림 등 걷기에 좋은 명소가 한가득이다. 걷다가 힘들면 정자나 의자에 앉아 편하게 하늘을 바라보자. 대나무 사이로 가을에만 만끽할 수 있는 높고 파란 하늘이 펼쳐질 것이다.

◆자연이 만든 풍광에 녹아들다

양편으로 빽빽이 서 있는 대나무들로 주위가 어두컴컴하다. 길지 않은 대나무 숲을 지나면 주변이 환해진다. 마치 다른 세상이 펼쳐진 듯하다. 흙길 옆으로 얕은 개울이 흐르고, 건너편으로 정자가 놓여 있다. 개울 건너편에는 나무 그늘이 정자를 덮고 있고, 담 넘어 정자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쬔다. 흙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개울을 건너는 돌 다리를 만난다. 개울 위로는 담이 쌓여 있다. 옆 마을과 이곳을 구분하기 위한 토석담이다. 담 아래로 개울이 흐를 수 있도록 돌기둥을 쌓아 담을 떠받치고 있다. 위태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수문처럼 보이는 것이 운치를 더한다.


개울을 건너 만나는 정자가 제월당이다. 담양 소쇄원의 주인이 정자 앞 대나무와 개울, 멀리 있는 산들을 바라보며 자연을 만끽하던 곳이다. 정자의 참맛을 느끼려면 정자 앞에 서서 봐서는 안 된다. 신발을 벗고 정자에 편하게 앉아 경치를 살펴야 한다. 정자에서 같은 곳을 서서 볼 때와 앉아서 볼 때의 차이를 느껴보자. 양반다리를 해도 좋고, 좀 더 편하게 다리를 뻗고 앉아도 좋다. 정자의 기둥과 마루, 천장이 이루는 사각형이 액자와 같다. 액자 안에 사진 대신 살아있는 풍경이 그대로 담겨 있다. 서 있을 때는 하늘과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이 시야에 없지만, 앉아서는 이 모든 것이 개울 등과 어우러져 한 폭에 담긴다. 옛 선조들이 꿈꾸던 무릉도원, 무이구곡을 담아내려고 한 모습이다.

제월당에서 내려와 담을 지나면 광풍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정원을 찾은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다. 개울 바로 앞에 자리 잡은 광풍각은 정자 가운데 방이 있고 그 주변으로 마루가 있다. 방문을 열면 사방으로 바람을 맞을 수 있다. 소쇄원을 조성한 이는 조선시대 선비 양산보다. 양산보의 호 소쇄옹(瀟灑翁)에서 따왔는데,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죽자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담양 지석마을로 내려와 소쇄원을 조성했다.


소쇄원에서 차로 10분가량 떨어진 곳엔 식영(息影)정이 있다.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다. 지금은 광주댐으로 막혀 광주호이지만 물길이 지나가는 곳 위에 자리 잡은 정자다. ‘그림자를 쉬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곳을 선인들은 ‘강 위에 띄어진 꽃배와 같다’고 묘사했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정원엔 자연스레 주변 선비들이 모여들게 된다. 대표적인 선비들이 면앙 송순, 고봉 기대승, 송강 정철 등이다. 조선시대 손에 꼽히는 문장가들이 이곳에 모여 시를 읊었다. 특히 현실 세계로부터 벗어나 자연 속에서 안식과 평온을 찾고자 하는 내용의 가사문학을 발전시켰다.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대표적인 가사가 바로 정원과 정자가 발달한 담양에서 나왔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보다 한 세대 후에 세워진 정자 명옥헌 원림은 9월까지 피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들로 둘러싸여 있다. 식영정에서 차로 10여분 거리다. 마치 꽃 속에 파묻힌 정자를 보는 듯해 무릉도원을 꿈꾸며 지었다는 얘기가 헛말이 아닌 듯싶다.
죽녹원은 대나무가 도열하듯 줄지어 터널을 이룬다.

◆바람을 타고 온 푸른 내음에 젖어든다

‘대나무길, 느티나무길, 메타세쿼이아길…’

마음에 드는 길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다. 고르기 귀찮다면 모두 다 걸어도 된다.

시작은 죽녹원부터다. 곧게 뻗은 대나무로 둘러싸인 곳이다. 한낮에도 이곳을 찾으면 어둑어둑한 동굴을 걷는 듯하다. 입구에 들어서 바로 앞에 있는 대나무숲길인 죽마고우길로 들어서도 좋고, 조금 더 걸어 전망대를 지나 시작되는 운수대통길로 가도 좋다. 어차피 죽마고우길로 가도 운수대통길로 연결이 된다. 쭉쭉 뻗은 대나무를 보며 걸으면 된다. 걷다 보면 마음이 안정되고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삼림욕, 정확히는 죽림욕 효과다.

여행객이 대나무숲길을 걷다 지루해질 만 하면 쉼터와 포토존 등이 기다린다. 특히 자신의 뱃살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은 인기 만점이다. 대나무를 이용해 여행객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일곱 칸의 문을 만들었는데 가장 넓은 ‘답 없음’ 칸부터 폭 17.35㎝ 칸까지 조금씩 공간이 작아진다. ‘답 없음’부터 시작해 어느 칸에서 막히는지 도전해보자. 약간의 부끄러움은 감내해야 한다.


죽녹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면 관방제림(官防堤林)으로 이어진다. 죽녹원 옆으로 흐르는 하천 건너편에 조성된 제방이다. 제방에 나무를 심어 숲길을 조성했다. 죽녹원에서 관방제림으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죽녹원 바로 앞에 다리도 있지만 주차장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징검다리가 나온다.


죽녹원 반대 방향으로 관방제림을 따라 걸으면 메타세쿼이아길까지 이어진다. 거리가 2㎞ 정도 된다. 거리가 제법 되니 10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담빛예술창고까지 간 뒤 승용차나 버스 등을 이용해 메타세쿼이아길로 가는 것도 좋다. 담빛예술창고엔 대나무로 만든 파이프오르간이 있다. 주말엔 공연도 하니 차 한 잔 마시며 공연을 즐겨보자.

메타세쿼이아길은 굵직한 몸통의 가로수가 사열하듯 늘어서 있어 동화 속 병정들이 열병식을 하는 분위기다. 이 길은 2000년 고속도로를 뚫기 위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가 주민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살아남아 관광명소가 됐다.

담양=글·사진 이귀전 기자frei5922@segye.com